나도 은혜를 받아서 기쁘고 즐거웠구나!
이만화 권사(1) / 홍제교회저는 1941년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읍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많이 지었던 저희 집은 가을이면 추수한 곡식이 창고 가득 쌓일 만큼 생활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감포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고 몇 년 후에는 아버지도 같이 나가셨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이셨던 부모님은 행사 때면 교인들을 집으로 불러 대접하고 교회에 강대상을 기증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1955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신다며 부산에 가셨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 은혜가 내리고 기사이적이 많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까지 내려가신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쯤 지나 돌아오신 어머니는 평소와 달라 보였습니다. 먼 길을 다녀오셨는데도 피곤한 기색 없이 얼굴에 윤기가 돌고 환한 모습이었고, 말수가 적으신 분이 웬일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해가 쨍쨍한 날 집회장에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게 둘러져서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하나님 주시는 은혜라고 해서 신기했다 하셨습니다. 또 찬송할 때 예전에 잘못한 일들이 떠올라 한참 울면서 회개했는데, 울고 나니 왜 그리 기쁘고 즐거운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며 활짝 웃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자꾸 웃으며 즐거워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목사가 먼저 좋은 구호물자를 챙겨가는
기성교회 모습에 무척 실망하신 어머니
은혜가 있는 전도관에 가겠다고 하시며
10년 넘게 다니던 기성교회에 발길을 끊어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장로교회에 갔다 오신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구호물자가 많이 오던 시절이었는데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 순으로 좋은 물건을 가져가고 정작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낡고 안 좋은 물건만 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사였던 어머니에게도 물건을 가지라고 했지만 “저는 먹고살 만한데 어려운 사람들 주라는 물건을 가져서 되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럴 수 있냐며 무척 언짢아 하셨습니다.
그즈음 저희 집과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감포전도관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포전도관에 부임한 전도사님은 동네 인사를 다니셨는데, 저희 집에도 오셔서 박 장로님께서 세우시는 전도관이 전국 방방곡곡 시골까지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박 장로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에 반가워하시더니 그길로 감포전도관에 다녀오셨습니다.
전도관에서 손뼉 치며 즐겁게 찬송 불러
집에 가는데 좋은 향기가 코끝에 진동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져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돼
그때부터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전도관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셨고 전도사님과 함께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전도관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전도관에서 안개처럼 뽀얗게 이슬은혜가 내리는 것을 보셨다며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참 기쁘고 즐겁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어 버리자 목사와 교인들이 찾아와서 전도관은 이단이라며 왜 이단에 빠졌냐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10년 동안 장로교회에 다녔어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며 은혜가 있는 전도관으로 가겠다 하셨습니다. 저는 단호한 어머니를 보면서 ‘전도관이 어떤 곳이기에 어머니가 저러실까?’ 하며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를 따라가 본 감포전도관은 작은 시골집을 예배실로 단장한 곳이었습니다. 힘차게 손뼉 치며 찬송하는 것을 처음 봤는데 저도 따라 즐겁게 찬송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찬송을 부르는데 어디선가 아주 좋은 향기가 계속 코끝을 스쳤습니다. 길가에 꽃이 피었나 하며 두리번거려도 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향기는 바람처럼 코끝을 스치며 진동했고,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서 계속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향기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나중에 설교 말씀을 듣고 알게 됐습니다. ‘은혜 받으면 마음이 기쁘다 하시더니 나도 은혜를 받아서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예배당에 나와 믿기만 하면 당연히 천국 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씻고 자유율법을 지켜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셔
안찰을 받고 나니 죄짓는 것을 멀리하고 눈길 하나 생각 하나도 조심하게 돼
어머니의 전도로 아버지와 동생들도 전부 감포전도관에 다니게 됐습니다. 전도관에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은혜 받은 식구들이 모여 사는 신앙촌에 하루라도 빨리 입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웃에 사시던 큰아버지는 왜 고향을 떠나느냐며 탐탁지 않아 하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때까지 신앙촌에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신앙촌이 어떻게 돼 있는지 알아보라 하시며 고등학생이던 남동생을 보내셨습니다.
남동생은 신앙촌을 보고 와서 큰 마을이 새로 지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택과 공장, 상점과 유치원까지 없는 것이 없었고, 어딜 가든 찬송 소리가 들려서 참 좋더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신앙촌에 입주할 것을 결정하고 이사할 준비를 시작하셨고 저희 가족은 1958년 봄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예배드리며 ‘자유율법’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 하시며 자유율법을 지켜서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장로교회에 다닐 때 예배당에 나와 믿기만 하면 당연히 천국 가는 줄 알았는데, 죄를 짓지 않고 자유율법을 지켜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소사신앙촌에서 처음 안찰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죄를 하나하나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서 무척 떨리고 긴장됐습니다. 제 차례가 됐을 때 배에 살짝 손을 대시기만 하는데도 얼마나 아픈지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쳤습니다. 아픔이 점점 덜해지고 시원함을 느끼자 손을 떼시며 “이 죄를 씻어야 천국 가지요.” 하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니 자연히 죄짓는 것을 멀리하며 눈길 하나 생각 하나도 조심하게 됐습니다.
건설대가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
하나님께서 안수와 안찰을 해 주시니
피곤한 줄 모르고 새로운 힘이 솟아올라
귀한 일을 하게 해 주심에 감사 기도드려
그때 신앙촌에 학교가 한창 지어지고 있어서 저는 학교 건설대에서 일했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대에 자주 오셔서 질통에 모래를 담아 주시고 물지게도 지워 주시며 함께 일하셨습니다. 또 건설대원들에게 자주 안수와 안찰을 해 주셔서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새로운 힘이 솟아올라 얼른 나가서 일하고 싶었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오늘도 보람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지어지는 신앙촌을 보면서 ‘귀한 일에 함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1958년 여름에는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교인들이 몰려와 노구산을 하얗게 뒤덮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감람나무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 호세아서에 기록된 대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분이 감람나무라 하셨습니다.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그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감람나무인 것은 온 세상이 부인 못 할 사실’이라고 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우레와 같이 손뼉을 쳤습니다. 저도 좋은 향취를 맡고 은혜 받았던 체험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과연 감람나무이신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만화 권사님 신앙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