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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자유율법 지켜서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될 때 얻는 것

홍경희 권사(2)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45

집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온몸이 가뿐하고 상쾌하여 발이 땅에 닿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고, 아무런 걱정 없이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집회장에서 계속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집회가 끝나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는 무척 아쉬웠습니다.

노구산집회에 다녀온 후부터 저는 대부도전도관에 나갔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교회 교인들이 찾아와서 전도관에 가는 것을 말렸지만 저는 이제야 바른길을 찾았으니 이 길로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노구산집회에 갔던 장로교회 교인들이 전부 전도관에 다니게 되면서 장로교회의 방해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길목마다 지키고 서서 전도관에 가는 것을 막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바깥에서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은혜가 내리는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노구산집회 갔던 장로교회 교인들이
전도관에 다니게 되자 장로교회 방해
점점 심해졌지만 은혜 내리는 곳으로
가겠다는 결심은 절대 변할 수 없어

저는 전도관에서 매주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자유율법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율법은 눈길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법이며 자유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자유율법을 알게 된 후로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려고 하면 ‘이런 마음만 품어도 죄가 되지.’ 하며 빨리 제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게 되었고, 잠깐 스친 생각도 자유율법에 비추어 죄가 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얻는 것이 아니라 자유율법을 지켜서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남동생과 함께 인천에서 생활하며 인천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인천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신앙촌을 마음속으로 늘 그리워하다가 1960년 무렵에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과 공장에서 근무하며 반죽을 저울에 달아서 계량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당시 빵 하나에 계란 한 개씩을 넣어서 만들었던 신앙촌 카스텔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공장에서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새 이곳저곳에서 직원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장에 자주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동안 생명물로 시신이 핀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많이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당뇨병 앓으셨던 권사님의 입관 예배 때 생명물로 씻기자 아주 곱게 피는 것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시신이 아름답게 핀다는 것 확실히 알게 돼

그러던 1960년 12월,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서울에 있는 동아일보사에 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동아일보에서 이슬 은혜가 찍힌 사진이 조작되었다는 기사를 자꾸 내보낸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슬 은혜가 내리는 것을 똑똑히 본 일이 있는데 조작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아일보사에 항의를 하러 간다고 하여 그길로 따라나섰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서 구호를 외쳤는데, 경찰들은 우리에게 곤봉을 휘두르더니 트럭에 타라고 하여 경찰서로 데려갔습니다. 저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슬 은혜가 내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을 두고 왜 조작이라고 한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후 1962년에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도 덕소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덕소에서는 메리야스 공장에서 근무하며 재봉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당시 빨간 내복으로 불렸던 엑슬란 내복이며 속치마 같은 제품이 큰 인기를 끌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바쁘게 생산했습니다.

1981년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시기까지 오랜 세월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헤아리며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 것 다짐

저는 덕소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소사에서는 입관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없었는데 덕소신앙촌에서 권사님 한 분이 7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을 때 입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은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에 고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뇨병을 앓으셨던 고인은 생전의 병색이 사라지고 얼굴이 뽀얗고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두 볼에 발그스름한 혈색이 감돌고 입술도 화장을 한 듯 붉은빛을 띠어서 ‘70대 할머니 얼굴이 저렇게 고울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시신이 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 나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숨을 거두고 나면 보기 흉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면 시신이 아름답게 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1년에 하나님께서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표하셨습니다. 무지몽매한 우리를 깨우치시고 가르치시며 하나님을 발표하시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깊으신지 헤아려 보며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계속 생활하던 저는 1996년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농장에서 근무하며 논밭의 작물을 키우고 과일나무를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은 없었지만 사시사철 때에 따라 농사일을 배우면서 즐겁게 일했습니다. 가을이 되어 어김없이 열매를 맺는 곡식을 볼 때면 꼭 결실을 맺는 삶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몇 년 전 이슬성신절로 기억되는데, 사진 전시실에 노구산 집회 사진이 전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노구산을 뒤덮은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저 속에 나도 있었지.’ 하며 그때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앞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뽀얗게 이슬 은혜가 내리던 모습이 떠올라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허락해 주시는 은혜 속에서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귀한 은혜를 잘 간직해야겠다고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며 다짐하곤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죄에서 떠나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홍경희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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