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시원해지며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밀려와
이순자 권사(1) / 부산 가야교회저는 1930년 경기도 수원에서 6남매의 셋째 딸로 태어나 건축 설계사인 아버지(故 이범순) 아래서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의 신식 직업인 건축 설계사로 활동하며 양복을 즐겨 입으시던 분이었는데, 태평양전쟁으로 혼란이 가중되면서 민간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서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8·15 해방 무렵, 저희 가족은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은암으로 이사하여 크고 좋은 기와집에 사당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당 안에 관제(關帝, 중국 촉나라의 관우를 무신으로 받들 때의 이름)를 비롯해 여러 신의 화상(畵像)을 모셔 놓고 가족들과 같이 엄격하게 예법을 지키며 제를 올리셨으며, 설계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사당을 섬기는 일에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연기군 서면 은암에 위치한 사당에는 부여, 논산, 청주, 충주 등지에서까지 찾아와서 떡과 과일로 제수를 푸짐하게 차려 놓고 지극 정성으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슬같은 성신이 내리고 향취 은혜를 직접 체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그토록 신기한 일이 놀랍기도 하고
‘정말 전도관에 무엇이 있긴 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던 1958년, 제가 결혼하여 친정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때였습니다. 어머니(故 정춘자 권사)가 6·25 전쟁 중에 소식이 끊어졌던 이모님을 찾게 되면서 서울 서대문에 사는 이모님과 자주 왕래를 하셨습니다. 당시 서대문전도관이라는 곳에 다녔던 이모님은 어머니에게 전도관에 나오라며 계속 권유하셨지만 처음에는 귀담아 듣지 않으셨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모님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이신 어머니는 저에게 전도관에 다니며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고, 그때부터 저는 연기군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이모님을 따라 서대문전도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모님이 전도관에 나온 계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이모님은 미군 부대의 세탁물을 맡아서 기계로 세탁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 기계에 어깨를 심하게 부딪혀 어깨뼈가 툭 튀어나오고 팔이 퉁퉁 부어올라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이웃이 “박 장로님 집회에 가면 은혜를 받아서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 보세요.” 하고 권유하여 1955년 7월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께서는 수만 명의 군중이 빼곡히 앉아 있는 사이를 아주 빠르게 다니시면서 한 명씩 안수해 주셨는데, 이모님 옆을 지나가시는 순간 아픈 어깨를 세 번 강하게 쳐 주셨습니다. 방금 전까지 꼼짝도 못 할 만큼 아프던 팔과 어깨가 씻은 듯이 나아서 훨훨 날아갈 듯 온몸이 가벼워졌으며 그 후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모님은 이 감사함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거라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또 이슬 같은 성신이 내리고 향기로운 향취 은혜가 진동하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토록 신기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정말 전도관에 무엇이 있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넘게 사당을 섬겨 왔던 저는 처음에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듣는 예배 절차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점점 시간이 흘러 저도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하게 되자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기쁨이 제 마음을 가득히 채워서 화내는 것과 짜증 내는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즐겁기만 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나 없으나 계속해서 솟아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일생 동안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예배 시간마다 구원을 얻으려면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강조하셨습니다. 바늘 끝만 한 죄라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신으로 죄를 씻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도 죄짓지 말라.” 하시는 가르침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율법을 지키며 양심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이 진실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구원을 얻는 것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한 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을 얻는 분명한 길임을 확신하게 되면서, 더 이상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머니와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구원을 얻는 참길로 가려면 헛된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이모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사당을 직접 보고 기겁을 하며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사당을 섬기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한 이모님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며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들으셨던 어머니는 마침내 “그동안 우리가 사당을 차려 놓고 밥 빌어먹은 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시며 사당을 정리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 결심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어머니와 저, 제 남편과 남동생까지 힘을 모아서 10년 넘게 받들었던 사당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당에 모셔 놓았던 화상, 제를 올리는 도구 들을 전부 불에 태우고 깨끗하게 정리한 후, 강대상을 마련해 서대문전도관 관장님을 모시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드렸습니다. 사당에 찾아와 제를 올렸던 동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당을 없애 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항의하기도 했으며,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서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