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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안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일할 때 가장 큰 기쁨 느껴

<신앙체험기 518회> 서대구교회 구수웅 권사편
발행일 발행호수 2658

덕소신앙촌 기록화(전혁림 화백 作)

저는 1942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우(牛)시장에서 일하시고, 어머니는 마을 장터에서 나물을 팔며 살림을 꾸려가셨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남매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저와 형제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7촌 아저씨 댁에서 일손을 거들었는데, 일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돈은 모이지 않았고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저는 가진 거 하나 없이 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도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서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운 좋게 소사신앙촌 근처의 새끼줄 만드는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새끼줄 공장 사장님은 신앙촌 교인이었습니다. 사장님의 여동생이 가장 먼저 하나님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고, 아버지의 입관예배를 전도관식으로 드린 뒤 아버지가 생명물로 아름답게 피어난 모습을 보고 가족 모두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장님을 포함해 가족 모두 소사신앙촌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이나 신앙촌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사장님 덕분에 자연스레 전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앙촌의 모습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다 사장님을 따라 신앙촌에도 몇 번 가보고, 예배에도 참석해 보았지만 그저 구경 삼아 바라만 봤을 뿐 신앙생활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이후 새끼줄 공장에 일감이 줄어들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마침 오리 농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농장 주인을 찾아가 면담하던 중 전에 일했던 곳 사장님이 신앙촌 분이셨고, 소사신앙촌에도 몇 번 가 본 적 있다고 하자 몹시 기뻐하며 즉시 저를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의 정직함과 성실함이 사회에서 신뢰받는 것을 보니, 저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집회를 여신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오만제단을 찾아갔습니다.

일단 예배실에 들어가 앉았지만 찬송을 몰라 그저 손뼉만 따라 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향기는 스쳤다가 사라지고, 잠시 뒤 다시 은은하게 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더니 마음에 기쁨이 점점 차올라, 앉은 자리에서 몸이 하늘로 둥둥 뜨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몸이 가벼워져서 하늘로 뜨는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예배실을 가득 메운 이슬성신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것이 가득 차올라 단상에 계신 하나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물 안에 안개가 끼는 것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니 창밖은 아주 맑고 청명한 날씨였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날 코끝에 맡아졌던 향기와 예배실 안에 가득했던 뽀얀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새벽예배에도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는데도 피곤하다거나 멀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걸음이 땅을 딛는 것 같지 않게 가벼워서 그 먼 거리를 날아갔다 왔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가끔 너무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맡으며 오만제단 앞에서 기다리다가 창가에 불이 켜지면 반가운 마음으로 예배실에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1962년 덕소신앙촌 건설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강공장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제강공장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현장을 찾으셔서 작업을 살펴보시고, 직원들에게 안수도 해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눈안찰을 받았는데, 처음 하나님의 손이 닿았을 때는 눈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런데 자주 안찰을 받을수록 눈이 맑고 시원해지는 것을 느껴서 계속 안찰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찰을 다 받고 나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지고 몸이 둥둥 뜨는 것처럼 가벼워졌고, 마음에 기쁨을 가득 안은 채 일하러 가곤 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가장 신기했던 일은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실 때면 향취가 강하게 맡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세상의 어떤 꽃향기로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좋았고, 가슴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스며드는 향기였습니다. 일하다가 향취가 진동하기 시작하면 ‘아,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셨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덕소에서 참 많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제강공장에서는 뜨거운 쇳물을 다루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을 바르면 흔적도 없이 낫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또 한 번은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목에서부터 뱃속까지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내 속이 시원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것이 불성신이라고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이 너무도 고마워 오래도록 머리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1970년대에는 기장신앙촌으로 옮겨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엑스란 내의’는 “안 입어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큰 인기를 얻어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많이 수출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지낸 시절이었지만, 거기서 얻은 보람과 자부심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1974년에는 첫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하게 열이 나서 급히 의무실에 데리고 갔는데, 아이는 그 잠깐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슬픔을 잠시 뒤로하고 저는 생명물을 가져와 직접 아이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피어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생명물의 놀라운 권능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짧은 생을 마친 아이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제 슬픔까지 거두어 주신 것만 같았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 느낀 때는 1998년,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출장 중이라 조금 늦게 신앙촌에 도착했고, 장례반에서 미리 생명물을 입에 넣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입관예배가 시작되기 전 아내를 확인하러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얼굴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5년 가까운 투병으로 살이 많이 빠져 거의 뼈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날 제가 본 아내의 얼굴은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와 있었고, 입술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참으로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아들도 “엄마가 살아 있는 것 같다”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고 나니 아내의 얼굴에는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너무나 평안한 모습이어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마음에는 기쁨이 넘치도록 샘솟아
어느 순간 예배실 안에 안개처럼 뽀얀 은혜가 가득 차올라
하나님 단상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정도.
세상을 떠난 아이와 아내가 생명물로 환하게 피어난 모습을 보며
이슬성신 은혜의 권능을 다시금 느끼게 돼

2000년에 저는 고향인 경북 상주로 내려가 서대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대구교회가 신축하게 되었고, 저는 무언가 보탬이 되고 싶어 틈나는 대로 교회에 와서 청소와 뒷정리를 도왔습니다. 당시 허리 통증이 있었지만 봉사를 하니 일상의 활력소가 되고 몸도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축의 마지막 단계였던 비둘기 종각이 세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2014년 마침내 간절히 염원하던 신축예배를 드리던 날, 전국 각지에서 교인들이 찾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다음날, 신기하게도 저를 괴롭히던 허리통증이 씻은 듯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과거 하나님께 은혜받고 몸이 가벼워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신 되뇌었습니다.

기장신앙촌에서 살던 시절, 밤하늘에 축복이 내리는 장면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밝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듯 내리던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없이 부어주신 은혜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젊은 시절 은혜 안에서 기쁘게 일했고, 또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주어진 일에 마음과 정성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교회 청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 심정으로 성전을 깨끗이 하며, 더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와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남은 시간 또한 기쁨과 감사의 기도로 채워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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