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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십자가

발행일 발행호수 2553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일본 전함 7백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사 1만 8,700명이었다. 바다를 뒤덮은 전함에 무수한 깃발이 나부꼈다. 흰 비단에 십자가가 선명한 깃발이었다. 이 부대 전원이 가톨릭 신자였고 세스페데스라는 종군 신부도 있었다. 고니시뿐 아니라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라 불리는 가톨릭 장수들이 임진왜란의 선봉에 나섰다. 그것은 일본을 통치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이었다.

도요토미의 야망은 중국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전인 1586년 선교사 가스빠르 꼬엘요 신부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장차 중국을 정복할 때 가톨릭이 지원해 주면 중국 전역에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중국인이 전부 가톨릭 신도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하느님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성스러운 검으로 선택하셨다.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거대한 승리를 얻게 될 것으로 믿는다.” 일본의 ‘성스러운 검’은 중국 대륙으로 가기 위해 조선의 명줄을 겨누었다.

임진왜란은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잔인한 전쟁이었다. 개전 1년 동안 주요 전투의 조선군 사상자만 15만 명에 이른다. 이는 전투 병력만 헤아린 것이고 학살 당한 양민 숫자는 제외했기 때문에 실제 피해는 훨씬 클 것이다. 일례로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 숫자는 5,800명뿐이었지만 학살당한 양민은 5만 명이 넘는다. 일본군은 성 안에 있던 조선인을 모두 창고에 몰아넣어 불태워 죽이고 가축까지 남김없이 도륙했다.

특히 평양성은 네 번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조선군 사상자가 3만 명을 넘었다. 가장 먼저 평양을 유린한 것은 십자가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였다. 그는 약탈과 학살의 와중에도 병사들이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세례를 받도록 했다. 일설에 의하면 고니시의 죽음 이후 로마 교황청은 그를 위한 미사를 행하고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십자가 깃발 아래 수백만 명을 학살한 십자군 전쟁도, 십자가를 내세워 원주민의 문화를 파괴한 포교 정책도 당시는 알 수 없었다. 역사를 피로 물들인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그 깃발은 다른 길을 찾는 듯하다. 만약 십자가 깃발이 평화의 이름으로 평양에 입성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을 홀리는 재주일까, 살길을 찾기 위한 궁여지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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