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 <13>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대량학살의 정당화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다시 쓰는 세계사<13>역사적으로 ‘대량학살’의 범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인종청소를 실시했던 히틀러가 원흉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히틀러와 같이 대량학살을 일으킨 A급 전범들이 가장 경배받고 추앙받는 시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가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7년 독일 해군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70년, 독일 공군 중장이 참나무를 야스쿠니에 선물한 사실을 보면 두 나라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 당시 철저한 동맹 관계였으며 기모노를 입고 촬영한 히틀러의 사진에서 두 전범국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히틀러의 기모노에는 나치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Hakenkreuz)가 수놓아져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십자가’로 대표되는 로마교회(로마가톨릭교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역사적인 사실을 따라가며 전범 국가와 기묘한 관계를 맺고 근본적인 동질성을 가진 한 집단을 추적해 본다. <자료1,2,3>
1933년 9월 17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축하와 찬양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유서 깊은 가톨릭교회 중 하나인 세인트 헤드비지스 성당에서 성대한 축하 미사가 열려 성당은 수많은 교황 깃발과 나치 깃발이 장식되어 펄럭였고 미사에는 정복을 갖춰 입은 나치의 친위대(Schutzstaffel, SS) 요원들이 특별 초대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미사를 주재한 세자레 올세니고는 교황대사로서 교황의 뜻을 전달하고 대리했으며 히틀러와 여러 차례 대면하며 교황과의 연결고리로서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설교를 하던 올세니고가 “히틀러는 가톨릭이 믿는 신에 헌신하는 인물(출처 : God’s Bankers : A History of Money and Power at the Vatican)”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자 가톨릭 신도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화답했다.
이날 가톨릭교회가 성대하고 화려한 축하 미사를 거행했던 이유는 바티칸과 나치, 다시 말해 교황과 히틀러 사이에 맺어진 “제국종교협약(Reichskonkordat)”을 대대적으로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 협약은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임명된 후 다른 국가(바티칸은 교황이 다스리는 국가이다.)와 맺은 첫 번째 조약이었고,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히틀러와 나치를 전 세계 앞에 인정해 줌으로써 히틀러가 그의 가공할 계획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협약의 단초는 가톨릭교회가 먼저 히틀러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롯되었다. 바티칸의 국무총리였던 에우제니오 파첼리(6년 뒤에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인물)가 히틀러에게 은밀하게 편지를 보내 나치의 정책을 승인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히틀러가 이에 응하면서 비밀 협상을 통해 협약을 맺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자료4,5,6,7,8>
33개 조항으로 구성된 제국종교협약의 특징은 히틀러 정부가 가톨릭에게 막대하고도 안정적인 금전을 선사하며, 이에 따른 대가로 가톨릭교회는 히틀러 정부에게 공식적이고도 확고한 정치적 지지를 약속하고 조인한 사실이었다.
조약에 따라 히틀러 정부는 독일 국민 전체에게 교회세(Kirchensteuer)를 부과하고 원천 징수하여 바티칸에게 제공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가톨릭교회는 전 국민에게 교회세를 걷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자발적으로 납부하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 징수할 방법이 없었는데, 히틀러 정부가 자동 급여 공제 제도를 통해 임금 소득자들에게 8~9%의 교회세를 강제 징수해 바티칸에게 송금하기 시작하자 현금이 고갈되었던 바티칸의 금고는 금세 안정을 찾게 되었다. 히틀러 정부가 걷어 들인 세금을 가톨릭교회에 제공했다는 것은 그만큼 히틀러와 가톨릭 간의 밀접한 결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금전을 보장받은 가톨릭은 조약의 내용대로 히틀러 정부를 향하여 굳건한 정치적 지지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제국종교협약 제16조는 가톨릭 주교와 추기경들이 히틀러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며, 가톨릭교회의 매 주일 미사에서 히틀러 정부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한다는 것도 협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추기경 폰 바오로하버는 일요일 미사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교황과 히틀러간의 협약은 헤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여! 히틀러를 보호하소서.” 추기경과 같은 가톨릭교회의 수장부터 매 주일 미사를 실시하는 일반 사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는 이 협약을 철저하게 이행하며 히틀러와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자료9>
주목할 점은, 이 협약이 조인된 후로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각국의 비난을 받았지만 가톨릭은 협약에서 탈퇴하지 않았으며 협약의 효력이 소멸된 적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협약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면 두 국가의 관계가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파트너라는 합리적인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일례로 1938년 11월 19일, 나치가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을 공격해 수천 곳의 유대인 사업장과 회당을 파괴했을 때 각국은 비난을 쏟아부었지만, 가톨릭 주교들은 “유대인은 예수에게 살인적 증오를 품은 종족”이라며 오히려 유대인을 비난하고 대중에게 격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어떤 의미로 보아야 할까.
1942년 12월 21일 교황 비오 12세가 유대인 학살에 이용되는 독가스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받고서도 나치의 범죄를 비난하는 연합국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절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대규모 인종청소와 학살을 지휘하는 히틀러에게 “걸출한 아돌프 히틀러 각하! 부디 신의 도움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고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던 교황의 진정한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하여 유대인들(미국 유대인 위원회)이 1979년부터 30년간 끈질기게 바티칸의 비밀 문서 공개를 요청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톨릭교회와 나치의 관계에서 파트너십을 넘어 근본적인 동일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단적인 예로 히틀러가 창안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학살의 현장마다 휘날렸던 나치의 십자가를 꼽을 수 있다. 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져서 ‘갈고리 십자가’라고 불렸던 이 문양은 히틀러가 어릴 적 다녔던 람바흐 수도원에서 봤던 것인데, 수도원의 석재와 목공예에 장식돼 있던 십자가가 히틀러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었다.
<자료10,11>
람바흐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받은 히틀러는 성가대원으로 활동할 때 가톨릭 미사에 도취되었던 경험을 성장한 후에도 생생히 간직했다. 어린 히틀러는 수도원장을 꿈꿀 정도로 가톨릭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 화가로 활동할 때도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를 경건하고 성스럽게 묘사한 것을 보면 십자가를 나치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십자가를 상징으로 내세운 두 집단의 근본적인 동질성, 다시 말해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결과를 보여 준 사실은 마녀사냥과 인종청소로 특징지을 수 있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교회가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과 아메리카 대륙 침탈, 종교 재판 등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15세기부터 시작돼 20만 명에서 50만 명을 학살한 마녀사냥의 광기는 독일 지방에서 극심했고, 끔찍한 화형과 고문의 방법을 자세히 열거해 놓은 책 ‘마녀의 망치’를 저술한 가톨릭 사제들도 독일의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의 수백 개가 넘는 문서 보관소와 도서관에는 가톨릭 재판부가 마녀사냥의 피해자를 심문한 내용이 자세히 남아 있었고, 이 심문 내용을 보면 가톨릭이 어떤 논리로 무고한 피해자를 마녀로 몰아 처형했는지 그 명분과 사상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학살의 명분은 ‘선을 위해 악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닦은 교부(敎父)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한 것으로, 그는 가톨릭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악에 대한 처벌이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적 뿌리는 피해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학살을 신성하게 여기는 마녀재판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히틀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 지도자로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하인리히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학자들을 동원해 마녀재판을 심도 있게 조사하고 33,800개가 넘는 카드에 마녀재판의 자료를 기록하면서 대량학살의 명분과 사상을 학습할 수 있었다.
학습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나치대원들은 독가스실에서 한 번에 수백 명씩 유대인을 죽이면서도
“악의 근원인 유대인을 소멸하는 것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신성한 의무”라는 신념을 고수했다. 이는 마녀재판을 주재한 가톨릭 사제들이 사람을 화형대에 올려 활활 타는 불길에 살이 녹아내리고 뼈가 드러나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도 “악이 소멸되고 너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엄중히 선언한 것과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료12,13>
가톨릭과 나치는 학살 중에 보여 주는 행태도 비슷했는데, 첫 번째 공통점은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처참한 대우였다. 나치는 강제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 중에 임신한 여성과 자녀가 있는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을 ‘노동 불능자’로 선별해 가장 먼저 독가스실로 보냈고, 살아남은 경우에도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와 비슷한 시기인 1900년대 중반 가톨릭교회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를 집단 학살한 사건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시설인 ‘세인트 메리의 집’에서 1925년부터 40년간 미혼 여성이 낳은 아기들 6,000여 명이 죽어 나갔으며 그중 796개의 아기 유골들이 정화조에 암매장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투여하며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자료14,15,16>
두 번째 공통점은 학살을 통해 금전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가톨릭교회가 마녀사냥으로 죽은 피해자의 재산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몰수했던 것과 같이 나치는 강제 수용소에 끌려온 부유한 유대인의 재산을 체계적으로 압수했다.
뿐만 아니라 나치의 학살을 통해 가톨릭이 직접적으로 이윤을 얻은 사업도 있었는데,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송 사업이었다. 당시 바티칸은 혼란이 가중되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히틀러가 보장한 교회세 덕분에 재정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이를 발판으로 전쟁 관련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제네랄리’라는 보험 회사에 투자하여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철도 수송에 대한 보험을 제공했던 제네랄리는 강제 수용소까지 유대인을 이동시키는 기차가 사고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가 유대인을 죽음의 기차에 실어 착오 없이 완벽하게 독가스실로 보내는 숫자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제네랄리의 수익은 높아졌고 이에 따라 바티칸의 수익 또한 증가되었다. 같은 뿌리로 연결된 두 집단이 돈이라는 열매를 함께 거두며 공존공생하는 관계였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세계의 여러 현안에 대해 발언하기를 즐기는 가톨릭교회 프란치스코는 최근 여러 가지 발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정치권을 향해서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다시 나타날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모든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욕심’이라며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가톨릭교회를 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고 스스로 정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가톨릭교회가 어렵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걷어 들인 ‘베드로 성금’에서 90% 이상을 바티칸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메우는 데 쓰거나 호화 부동산을 투자하는 데 썼다는 폭로였다.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교회 운운하는 목소리는 5천만 유로(약 663억원)에 달하는 베드로 성금의 엄청난 규모와 불투명한 투자 행태를 밝히는 사실 앞에서 머쓱해졌다. 그렇다면 악의 뿌리를 논하는 자가 도리어 악의 뿌리와 연결된다는 사실 앞에서 그가 다시 꺼낼 카드는 무엇일까. 최근 섹시 스타의 SNS 사진에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좋아요’를 눌러 놓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처럼 ‘악의 뿌리’에 대해서도 침묵의 카드를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는 것일까. <자료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