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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을 받는 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김용례 집사/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43

김용례 집사/기장신앙촌

1963년 제 나이 스물 세 살 무렵,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는 인적 드문 시골이었습니다. 한참을 가야 집이 한 채씩 나오니 이웃들과 왕래가 별로 없었는데 언제부턴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찾아와 전도관에 나와 보라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잠깐 장로교회 다녔을 때 목사가 전도관만은 절대 가지 말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전도관이 나쁜 곳인 줄 알고 속으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찾아와 말씀하시는 것을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원통전도관에 따라가 봤습니다. 흙벽돌로 지어진 전도관에는 어른과 청년, 아이들까지 꽤 많은 교인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몇 명씩 짝을 이뤄 집집마다 전도하러 다녔고 청년들은 아이들 가르치는 반사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도관 교인들은 진실하게 믿으려고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도관 권사님들은 저에게 마음 문을 열고 자세히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들 권유로 소사신앙촌에 갔습니다. 소사신앙촌은 전도관 교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고 전도관을 세우신 박태선 장로님께서 건설하셨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에서 처음으로 박 장로님을 뵙게 됐습니다. 제단이 하도 넓어서 단상에 서신 박 장로님이 어렴풋하게 보였지만 힘차게 찬송 인도하시는 음성과 그 많은 사람들이 우렁차게 찬송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찌된 일인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참 이상하다.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나지?’ 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연기 나는 곳도 없고 태우는 것도 없는데 지독한 냄새가 났습니다. 권사님들에게 물어보니 죄 타는 냄새를 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내 속에 있는 죄를 소멸해 주시기 때문에 죄 타는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죄를 태워 주시고 그 냄새를 실제로 맡게 된다는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고 전도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권사님들은 그런 저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전도관에서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해 물어보니
하나님 은혜로 내 속의 죄가 소멸되면 죄 타는 냄새 맡게 된다고 해서 신기해

그즈음 교인 한 분이 돌아가시자 권사님들이 장례예배에 가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며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고인을 모신 방에 전도사님이 먼저 들어가시고 저는 무서워 멀리서 봤는데, 할머니이신 고인은 얼굴색이 시커멓고 입술은 검은 자주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습니다. 전도사님은 먼저 솜에다 물을 묻혀 고인의 얼굴에 덮어 주시며 박태선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축복솜과 생명물이라 했습니다. 교인들과 같이 힘차게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는데 얼마쯤 지나자 방 안 공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불쾌한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좋은 향기가 맡아져서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날까? 이때까지 안 좋은 냄새였는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생처음 맡아 보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찬송을 부른 후 전도사님이 고인의 얼굴을 보여 주셨는데, 시커멓던 피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환하게 피고 검자주색으로 죽어 가던 입술도 분홍색으로 곱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나쁜 냄새도 사라지고 흉한 모습도 없어졌구나!’ 하며 참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깥이 소란스러워 방문을 열어 보니 고인의 큰아들이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고인의 작은아들은 전도관에 다니고 큰아들은 다니지 않았는데, 큰아들이 막무가내로 장례예배를 드리지 말라면서 작은아들이 아무리 예배를 종용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배를 못 드리게 되어 일어서서 나오는데 문득 ‘향기가 다 어디 갔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 안 가득 진동하던 향기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좋은 향기가 없어지고 나니 저는 귀중한 것을 잃은 것처럼 몹시 아쉽고 허전했습니다. 같이 간 권사님들에게 물어보니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좋은 향취를 맡게 되지만 그 은혜가 떠나시면 향취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셨습니다. 장례예배에서 은혜 받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직접 겪고 나니 비로소 공감할 수 있었고 전도관을 제대로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에 꾸준히 나가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의구심이 차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말라 하시는 자유율법을 들으면서 참 바르고 옳은 길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사 말만 듣고 색안경을 꼈던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습니다.

고인을 모신 방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났고 고인의 얼굴은 시커멓고 입술도 검붉어
축복솜에 생명물을 묻혀 고인의 얼굴을 덮어드리고 교인들과 찬송을 부르자
방 안에서 아주 좋은 향기가 맡아지고 고인의 얼굴은 맑고 환하게 피어나

그러던 중 장례예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은혜 받을 기회라는 생각에 누가 권유하지 않아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무서운 마음도 사라져 고인의 모습을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장례반 권사님들이 옷을 갈아입힐 때 보니 고인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다리를 움직이면 머리까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팔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굳어 있어서 옷을 가위로 잘라서 벗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씻긴 후에 고인을 보니 그렇게 뻣뻣하던 몸이 완전히 노긋노긋해져서 팔다리가 부드럽게 움직여졌습니다. 살아 계신 분처럼 앉혀 놓고 수의를 입힌 후 입관했는데 누워 계신 모습이 달게 주무시는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밤을 새우며 관을 장식할 꽃을 만들 때였습니다. 어느 순간 관 주위로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한겨울이라 창문을 꼭꼭 닫아 놓았고 만약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면 위에서 내려와야 할 텐데 그 바람은 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바람이 너무나 기분 좋게 산들산들 불어 왔습니다. 그것이 성신의 바람이라 하시기에 돌아가신 분을 성신으로 지켜 주시는구나 하며 그래서 저리도 평온해 보이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돌아가니 집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완고한 부모님은 왜 남의 장례식에 가느냐며 싫어하셨고 전도관에 가는 것도 반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확고한 결심이 생겼습니다. 성신이 계신 곳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신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며 돌아가신 분도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성신을 받는 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나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며 제 또래들과 같이 반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교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신앙촌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동료들과 같이 일하며 즐겁게 찬송을 부를 때면
좋은 향취가 진하게 맡아지며 몸이 날아오를 것 같아
신앙의 동료 있다는 것이 고맙고 감사해

덕소신앙촌에 들어간 날 하나님께 처음으로 안찰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안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내가 지은 죄를 안찰로 소멸해 주실 때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안찰받을 때 하나님께서 제 눈에 손을 살짝 얹기만 하셨는데도 후벼 파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거 다 빠져야 구원 얻지.” 하시며 안찰해 주셨고 통증이 차츰차츰 물러가고 시원해지자 손을 떼셨습니다. 그때부터 죄가 다 빠져야 구원 얻는다 하시던 말씀을 항상 생각하게 됐습니다. 성신으로 죄를 씻음 받고 마음이 성결하고 아름답게 피어서 천국에 꼭 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은 한강 변에 들어선 그림 같은 마을이었습니다. 공장들이 활발히 돌아가고 주택과 제단, 학교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저는 슬레이트 공장에서 일하며 참 재미있었습니다. 신앙촌 슬레이트는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안 나가는 데가 없었고 물건을 가지러 오는 거래처 차량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동료들과 일하며 즐겁게 찬송을 부를 때면 좋은 향취가 진하게 맡아지며 몸이 날아오를 듯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길을 가는 신앙의 동료가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 후 1981년 하나님께서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 저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초창기부터 이슬 같은 은혜를 주시고 향기를 주시는 감람나무라 하셨는데, 성신을 주시고 죄를 씻어 주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이미 다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며 한 단계 한 단계 밝히셨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구원을 주시려고 그토록 긴 세월을 참으시고 애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97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해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와 만나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일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셔서 안수해 주셨던 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돌아보면 신앙촌에서 지내 온 하루하루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귀한 곳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요즘은 새벽예배를 드릴 때면 ‘하나님! 저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요?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 계신 아름다운 세계에 가고 싶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허락해 주신 시간 동안 말씀대로 바르고 맑게 살아서 그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김용례 집사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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