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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불법방영사건(9)박마리아, 김경래 그리고 탁명환④

'신흥종교'의 옥석을 못가렸다
발행일 발행호수 2049

편견에 사로잡혔던 ‘종교 감별사’ 탁명환, ‘신흥종교’의 옥석을 못가렸다
1970년대 이후 천부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자료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곳이 바로 탁명환의 ‘종교 연구소’ 사무실이었으며 탁명환은 날조된 자료들을 준비하였다가 그들에게 비방의 근거를 제공하곤 하였다. 그만큼 탁명환은 온 세상에 천부교를 부정적으로 소개하였으며 그는 천부교 비방의 대부가 되었던 것이다. 1999년 6월 3일 MBC가 천부교에 대한 음해 방영을 하면서 주된 근거로 하였던 것도 예외 없이 탁명환이 저술한 책이었다.

그렇다면 탁명환 그는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천부교에 대한 허위사실 날조와 조직적 음해의 역사는 백영기 목사와 김경래 기자로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 이후부터 탁명환이 그 바톤을 이어받고 있었다. 탁명환이 신흥종교문제 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천부교에 대해 비이성적 비방과 음해를 계속하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김경래였다.

1957년 천부교에 대한 세계일보의 허위 보도사건 이후에도 인척 관계였던 백영기 목사 부부와 재단법인 성민원을 설립하여 이사로 활약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던 김경래는 탁명환이 저서를 낼 때마다 기꺼이 추천사를 써 주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였다. 1994년 탁명환이 대성교회 교인 임홍천에게 피살되자 김경래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탁명환이 ‘순교’하였다며 장례를 집전했던 것이다.

1937년 전북 무안 출신으로 기독교계열 신문의 기자노릇을 하던  탁명환은 1967년 경부터 ‘신흥종교문제 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종교문제 연구가’로 변신하였다. 그는 백백교, 용화교, 동방교, 통일교, 영생교 등 사교집단을 파헤쳐 교주의 재산 수탈과 간음행위 등을 사회에 고발함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교에 의한 피해를 일정 부분 막았다는 평가와 ‘사교 감별사(鑑別士)’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 행태는 종교와 교리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객관적 조사 활동과는 거리가 먼 것이 특징이었다.

그가 사교라고 ‘감별’해 냈다는 종교들은 모두가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과 법 규정에 비추어 누가 보아도 사교인 것을 알 수 있는 것들로서 구태여 탁명환의 ‘감별’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언론과 기성교계에서는 그를 사교 집단과 맞서 싸우는 투사라고 추켜세웠고 그는 이로 인하여 점점 더 안하무인이 되어 갔다. 그는 ‘신흥종교’의 옥석을 구분 짓지 못하고 모든 신흥종교를 부정적 시각으로 재단하고 비방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탁명환은 신흥종교라는 선입관과 편향적 시각을 가지고 특별히 천부교에 대하여 근거 없는 비방을 하였다. 그는 다른 사교들과 천부교를 같은 ‘신흥종교’라는 범주에 넣어놓고 천부교를 부정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허위사실의 조작과 날조도 서슴지 않음으로써 종교적 양식과 학문적 객관성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탁명환은 그의 저서 『한국의 신흥종교 기독교편』 제1권(1972년), 제2권(1973년), 제3권(974년), 제4권(1987년), 『이것이 전도관이다 』(1975년), 『기독교 이단연구』(1999년)등에서 천부교 교리의 근간이 되는 동방의 땅끝, 감람나무, 이슬성신, 안찰과 생명물 등에 관한 세가리아, 호세아, 이사야, 묵시록 등의 성경기록에 관하여 동문서답식 해석을 해 놓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기성교회에서 배운 성경해석의 범주를 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과 교리문제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는 천부교를 다른 신흥종교와 동류(同類)로 몰기 위해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없는 사실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끈질기게 천부교를 매도(罵倒)하는 특이성을 보였다.

탁명환이 천부교를 음해하는 방법은 매우 지능적이었다. 그는 우선 백백교, 보천교, 통일교, 용화교, 태극도청, 동방교회, 단군교 등 누가 보아도 혐오스러운 사교들의 이름을 나열한 후에 고의적으로 천부교를 끼워 넣고 곧잘 ‘신흥종교’를 비판한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호생기도원, 대한기독교 장막성전, 새마을 전도회, 팔영산 기도원, 시온산 제국, 대한예수교 천국복음 기도제단, 대한 기독교 천도관, 영생천국 본부, 세계 순금 등대교회, 정도교, 그리스도 구원선, 신생원 등 기독교 이름을 빙자한 여러 사이비 잡교들을 의도적으로 천부교와 ‘비교’ 한다고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제목만 보고서도 자연스럽게 천부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저질스러운 수법은 1999년 MBC가 천부교에 대한 방영을 하면서도 그대로 답습한 바 있다.

천부교에 대한 탁명환의 수많은 명예훼손 행위와 관련한 고소 사건들에 관하여 사법부는 대부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탁명환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천부교를 비방하였고 그가 비방하는 사실은 상식적으로도 그렇다고 믿을 만한 객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탁명환의 명예훼손죄를 인정한 판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탁명환의) 변호인은 탁명환이 한국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 이탈신도의 발언을 믿고 위와 같은 설교를 하였으며 설교 등의 내용이 진실한 사실로써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임으로 탁명환은 무죄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므로 살피건대 이탈신도의 법적 및 경찰에서의 각 진술만으로는 피고인의 위 설교 내용이 진실한 사실이라고 단정하기에 미흡하고 달리 그 점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으며 피고인이 그 사실을 진실이라고 확신하였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믿는 것이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인정될만한 아무런 증거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 것이므로 결국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다.` (1983. 7. 15 서울형사지방법원 82고 단2147 판결문에서)

그는 점차 오만한 독선적 도그마에 빠지게 되어 신흥종교뿐만 아니라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기성교회 목사들의 약점과 비리를 발굴하여 폭로와 협박 공갈을 일삼는 폭로 전문가로 전락하게 되었고 1984년 7월 23일 예장합동 평동노회 임시 노회장에서 폭력배를 동원하여 4시간동안 난동을 부리는 등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행위도 불사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수많은 고소 고발 사건이 줄을 이었다. 탁명환이 관련된 고소사건은 모두 80여건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69년 7월 31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음란 문서죄로 처벌, 1974년 4월 3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명예훼손죄로 벌금선고, 1975년 2월 19일 울산 경찰서에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입건, 1980년 11월 21일 서울 지방검찰청에서 명예훼손죄로 입건, 1981년 3월 26일 중부경찰서에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입건되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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