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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불법방영사건(7)박마리아, 김경래 그리고 탁명환②

박 마리아의 배후 압력을 시사
발행일 발행호수 2047

김경래 기자 `기사 작성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박 마리아의 배후 압력을 시사

이기붕씨가 1956년 세계일보의 사주가 된 경위에 대하여 세계일보 창간 전무였던 설국환씨(현 대한여행사 회장)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북(李北)씨가 운영하던 당시의 중앙일보를 이북 씨가 사망하자 부인 최희섭씨가 잠시 경영하였는데 이를 이기붕이가 인수하면서 이름을 세계일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이기붕씨를 잘 아는데 하루는 나를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자기가 중앙일보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같이 일을 하자는 거예요. 사장은 공진항씨 였는데 잘 나오지 않고 내가 거의 일을 보았지요. 나의 직책은 전무이사 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박 마리아 일가의 소유가 된 세계일보는 1957년 3월 18일자 3면 톱 기사로 백영기 목사와 그의 처 장애삼 여인이 공동으로 낸 고소장을 경찰에 접수시켰다는 기사를 싣게 된다. 고소장의 내용은 9년 전인 1948년의 일이라며 전도관의 ‘혼음 사건’을 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기사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다른 신문에는 일체 나지 않고 오직 박 마리아 일가 소유의 신문에만 났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런 사건이 조금이라도 객관적이고 신빙성이 있었다면 전도관에 비판적이었던 당시의 언론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뉴스거리가 되어 온 신문에 도배가 될 정도로 대서특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영기 목사 부부의 이른바 ‘혼음 고발사건’은 고소인의 신분, 고소의 동기 및 고소 내용,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고소장만을 불쑥 제출한 점 등 많은 허점이 발견되어 비판적인 언론에서조차 일체 취급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세계일보에 실린 문제의 ‘혼음 기사’는 백영기 목사 부부가 고발하고 김경래라는 기자가 보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혼음 사건’을 고발한 백영기 목사가 김경래 기자의 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백영기 목사는 김경래 의 처 차은희의 어머니 백 영의 남동생이었던 것이다. 이 고발사건에 김경래 기자와 그의 처 외삼촌 백영기 목사, 그리고 박 마리아 소유의 세계일보 삼자(三者)가 관련 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천부교를 음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 졌다는 것을 시사하기에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후술 하겠지만 백영기 목사 부부도 이미 전도관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경래 기자는 자기의 처 외삼촌 백영기 목사의 ‘고발사건’을 ‘취재’하여 세계일보에 실었지만, 문제의 기사를 자신의 자의로 쓴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부득불 쓰게 되었다고 고백 함으로써 그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김경래 기자에게 압력을 행사한 배후의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박 마리아였다.

김경래 기자의 ‘양심 고백’은 한 제자와의 서신교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부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부산 전도관의 정성기(65세, 현 천부교 부산교회 관장, 남부지역 총무) 학생은 1950년대 초 자신의 부산초량초등학교 시절 음악선생으로 있었던 김경래가 세계일보에 터무니없는 허위 보도를 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은사 되시는 분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허위사실을 보도하다니 제자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라는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얼마 후 김경래는 그의 제자 정성기 학생에게 편지지 4장 분량의 긴 답장을 보내왔는데, `그 기사 내용은 전혀 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득불 기사화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나 자신의 처지를 널리 이해해 달라. 전도관에 대단히 미안하다. 앞으로는 자중하겠다.`라고 구구절절이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에는 김경래가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군에 입대하였으며 군복무를 마치고 신문사에 들어갔다는 사적인 이야기까지 쓰여 있었으며 어쩔 수 없이 그러한 허위 기사를 쓰게 된 것을 이해해 달라는 간곡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정성기 관장은 회고하고 있다.

한편 사건의 고발자인 백영기 목사도 천부교 신자들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히자 1957년 3월 23일자 본지에 ‘분을 참치 못하고 신자로서 도에 넘치는 투쟁을 하게 되었음을 충심으로 사과합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성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백영기 목사의 고발이 어떠한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번에 본인 등은 전도관 당국에 전쟁고아 80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본원에 대하여 여러 번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할 뿐 아니라 주일날 중앙전도관 문전에서 출입을 거부하고 ‘우리 전도관을 반대하는 자가 무엇 하러 오는가’ 라고 공박하므로 본인 등은 극도로 격분하여 신자로서 분에 넘치는 투쟁을 하게 되었음을 본의 아니게 생각하고 교계와 일반 사회에까지 소란을 끼침에 대하여 충심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당시 부산에서 성민육아원이라는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던 백영기 목사는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다. 세계일보 3월 29 일자 3면에는 `부산서 성민육아원을 경영 중인 백영기 목사와 그의 처 장애삼은 몇 달 전부터 전도관을 찾아가 느닷없이 200만 환의 돈을 요구했다가 거절 당하였다.`라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육아원에 대한 원조를 명분으로 여러 번 전도관에 찾아와 금품을 요구하였다가 거절 당한 전력이 있어 전도관에 앙심을 품고 고발사건을 일으켰으나 본의가 아니었다고 위와 같이 광고까지 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영기 목사 부부가 아무리 전도관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혼음 사건’이라는 것을 날조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 선생의 담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윤치영 선생은 세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혼음 행위는 지금도 통일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것은 뻔한 일이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50년간 신앙생활을 했지만 박 장로님 같은 분은 처음 보았다. 그분을 통해 은혜를 받고 내 생활이 깨끗해졌으며 내 병도 나았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박 장로님을 믿는다. 나는 정치운동을 하기위해 이 단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일보 1957년 3월 19일자 3면)

윤치영 선생의 말에 따르면 ‘혼음 사건’이라는 것은 당시 시중에 통일교의 혼음 소문이 널리 떠돌고 있었는데 백영기 목사 부부가 그것을 전도관에다 뒤집어씌워 고발을 한 것임을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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