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감람나무 하나님께서는 따르는 교인들을 생명의 말씀과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며 어두웠던 눈을 밝혀 천국을 바라보게 해주셨습니다.
감람나무 가지들은 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나의 눈물과 땀으로 맺은 열매라 하셨던 하나님. 그 귀한 사랑은 한없이 내리는 이슬같은 은혜로 임하시며 지금도 함께해 주시고 계십니다. 천부교인들은 오늘도 하나님과 맺은 구원의 약속을 가슴에 새기며 하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이번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토록 친절하시고 사랑 넘치는 모습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저는 충무로4가에 있는 박 장로님께서 운영하시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에서는 공구류의 물건을 만들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몇 군데 안 되는 생산 기술이기 때문에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습니다.
어떤 날은 흥에 겨워 유행가를 부르며 일을 하면 언제 오셨는지 “조 선생! 노래 참 잘한다. 그런데 그 노래를 찬송가로 바꿔 부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는 저를 조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계신가요?” 하고 여쭈면 “조 선생! 아직 모르는구먼.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셔.” 하셨습니다.
1952년도 2월 말경, 저는 박 장로님과 같이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기억이 나는 것은 박 장로님께서 교인들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며 안내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그토록 겸손하시고 사랑이 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우리는 설렁탕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남대문 과일 시장에 가서 사과 1상자를 사서 시장을 지나 언덕 위에 팔각정이 있는 넓은 잔디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둥그렇게 앉아 찬송가를 가르쳐 주셨는데, 한참 동안 가르쳐 주신 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독창을 시키셨습니다. 잘 부른 사람은 사과 2개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과 1개를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찬송을 잘 부른다고 칭찬하시며 사과 2개를 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린아이가 소풍 온 것같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일일이 전차표를 나눠 주셨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지곤 합니다. 유행가를 부르며 작업을 했던 종업원들이 그날 이후로 찬송가를 부르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박 장로님께서는 듣기 좋다고 하시며 점심시간에 찬송가를 가르쳐 주시곤 했습니다.
조남준 권사/기장신앙촌
교인 한 명 한 명 보호하고 지켜 주셔
1961년부터 저는 청주전도관으로 매일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음악 종 소리를 들으며 예배드리러 가는 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예배드리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기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관을 반대하시던 시어머니는 제가 새벽부터 전도관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더니 전도관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집을 옮기라 하셨습니다. 시어머니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이사는 했지만 하루라도 새벽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전도관까지 가려면 산을 넘고 내를 건너 15리를 걸어야 했지만 저는 매일 새벽마다 걸어서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깃불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시골이라 달빛에 의지해서 다녔는데 특히 그날은 구름이 많이 끼었는지 달빛도 없어서 밤처럼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산길을 조심조심하며 걸어갈 때 갑자기 위에서부터 불빛이 비쳐서 주변이 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앞에는 물이 불어나 깊어진 냇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없었더라면 잘못 빠졌을지도 모르는데 보름달처럼 환한 빛이 비쳐서 안심하고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너무 가벼워서 발이 땅에 닿는지 안 닿는지 모르게 전도관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 마치고 다시 냇물을 건너면서 생각해 보니 아까 어떻게 그런 불빛이 비쳤을까 싶은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무 빛도 없이 캄캄했는데 주위가 환하도록 밝은 빛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 후 덕소신앙촌 축복일예배에 갔을 때 하나님 설교 말씀을 듣고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인이 새벽예배 가려고 캄캄한 산길을 지날 때 내가 빛을 비추어 줬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니 저 같은 체험을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놀랍고 신기하게만 여겼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교인 한 명 한 명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그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유정옥 권사/충주교회
찬송으로 화답해주신 하나님
1970년 저는 기장신앙촌 건설대로 내려와 건물을 세울 땅을 다지는 기초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작업을 해야 할 땅은 갯벌이나 다름없어서, 진흙을 아주 깊이 파내려 가야만 단단한 지반이 나왔습니다. 계속해서 진흙을 퍼내고, 지반을 다지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현장에 오셔서 늘 함께해주시니 저희는 기쁜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씩 일하던 건설대원들을 모두 모이게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동그랗게 빙 둘러앉아 한숨 돌리기도 하고, 하나님과 힘차게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평소처럼 다 같이 둘러앉아 쉬는데, 하나님께서 엄 집사님에게 노래 한 곡 불러보라 하셨습니다. 엄 집사님은 음성이 무척 곱고, 노래를 참 잘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집사님은 찬송가를 한 곡 부르셨는데, ‘나 행한 것 죄뿐이니 하나님께 비옵기는’으로 시작하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씻어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했습니다.
집사님이 노래를 마치자 하나님께서는 화답하듯 곧바로 찬송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가사는 ‘오 할렐루야 하나님 지난 죄는 사함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저희 모두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찬송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함께해 주시던 젊은 시절, 조금의 죄라도 짓지 않으려 조심하며 생활하던 그 때의 마음을 간직하여 앞으로도 더욱 맑고 성결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이형례 권사/울산교회
한없이 허락해 주시는 축복
1981년경 저는 기장신앙촌 메리야스 공장 원서무로 매달 이틀 정도 밤을 새우며 일했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아니라 수기로 작성하고 계산하던 시절이라 재고 파악, 손익 계산, 세무 보고 등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새워 일할 때였습니다.
하나님 사택이 메리야스 공장 맞은편에 있었는데 저녁 9시가 되자 “쉭! 쉭!” 하시며 축복하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에 몰두하다 문득 귀를 기울여 보면 축복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자정을 넘어 새벽 3시, 4시까지 쉬지 않으시는 축복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밤새워 신앙촌을 축복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제가 직접 축복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1초도 주무시지 않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많은 사람 앞에서 증거해야겠다!’ 그 후 1983년 여성회 교역자로 발령받으면서 바라던 대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서울 마포교회를 시작으로 교역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일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역자가 된 후로 신앙촌에 올 때면 하나님 세워 주신 신앙의 터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새삼 느껴져 정문에서부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기장신앙촌에서 소사, 덕소 신앙촌을 거쳐 서울의 중앙전도관까지 다니시며 예배를 인도해 주셨던 일, 수출 바이어를 직접 만나시고 수십 개 공장을 지휘하시던 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하시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 이 터전을 세우기 위해 한없이 희생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현재 저는 죽성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습니다. 초창기부터 따라오신 세대부터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는 젊은 세대까지 교인들과 함께 귀한 은혜 속에서 보람 있게 살기 위해 교역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주신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힘껏 달리겠습니다.
최종희 관장/죽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