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로 불러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순덕 권사(4)/기장신앙촌(지난 호에 이어)
“바다를 먹물로 삼아 하늘에 쓴다 하여도 우리 주 하나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덕소신앙촌 제강공장에서의 은혜 체험
하나님께서는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제철(製鐵) 산업을 일으켜야 된다고 하시며 1962년 12월 말경 덕소신앙촌에 제강 공장 건설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안 되어 완공된 건물에 설비까지 갖추게 된 제강 공장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힘차게 돌아갔습니다. 제강 공장을 가동하고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는데, 철강 특수 기술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앙촌 사람의 손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건설대에서 제강 공장으로 배정받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자체 기술로 이루어 낸 곳에서 일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생겨 동료들과 함께 더욱 힘을 내 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공정 중의 하나인 고철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며 있는 힘껏 일하면 마음이 기뻐지고 더욱 힘이 생겨난다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강 공장에 자주 오셔서 둘러보셨는데 그때마다 일하는 저희들을 위해 안수와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눈 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셔서 직원들 모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한 명씩 차례대로 눈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께서 두 손을 제 눈에 살며시 가져다 대셨는데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 몸이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져서 마치 솜뭉치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온몸에 뼈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단단하고 딱딱한 것은 전부 사라지고 살들만 포근포근하게 남은 것 같은데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떼시고 다음 사람에게로 가시자 그 느낌이 싹 사라지고 원래 제 몸으로 돌아왔다고 느껴지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날은 집에 와서도 눈 안찰 받았을 때의 느낌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귀한 은혜를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은혜를 또 받고 싶은 마음에 저녁 내내 눈물 흘리며 기도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무렵 저희 셋째 언니(이순일 권사/現 기장신앙촌)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언니가 신앙촌에 들어오기를 고대하시며 언니에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언니가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고, 온 가족이 아름다운 신앙촌에서 살게 되어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건설하는 내내 함께해 주셨던 하나님
1970년에는 소사와 덕소에 이은 세 번째 신앙촌인 기장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위치는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에 속한 곳이었습니다. 소사와 덕소신앙촌을 건설했던 대원들이 4월 5일에 버스를 타고 내려가게 되었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신앙촌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밤새 버스를 달려 도착한 기장신앙촌은 갯벌로 이루어진 땅이라 난공사가 예상되었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 무엇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건설 경험을 통해 배웠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갯벌과 같이 무른 땅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단단한 땅이 나올 때까지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먼저 세우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려면 구덩이 속에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부어 굳혀야 했는데 그 깊은 구덩이를 다 메우는 것은 무척 고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업을 함께하신 후 저녁이 되면 덕소신앙촌의 새벽예배를 인도하시기 위해 다시 경기도 덕소로 돌아가셨다가 다음 날 아침 저희보다 먼저 건설 현장에 오셔서 힘차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작업이 남아 하나님께서 덕소로 출발하신 후에도 조금 더 일하게 됐는데, 먼 길을 가셔야 함에도 저희들을 걱정하시며 “일찍 끝내야 한다.”고 책임자에게 거듭 당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식사를 일찍 마치고 현장에 나갔더니 하나님께서 작업 진행 상황과 자재 수량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계셨습니다. 저희가 밥을 먹고 쉴 때에도 현장을 두루 살피고 계시는 모습에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고, 일할 때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서 더욱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건설이 한창이던 어느 날, 모래와 자갈을 구입해 왔더니 자갈에 이물질이 많이 묻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나쁜 자갈과 시멘트를 배합하면 단단하게 굳지 않고 건물이 부실해질 우려가 있어 자갈을 아주 센 수압으로 씻어내게 되었습니다. 자갈을 일일이 씻으려면 큰 호스로 물을 뿌려야 했는데, 수압이 워낙 세다 보니 호스를 잡고 버티는 것도 힘들어 웬만한 사람은 호스를 잡았다가 나자빠지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스를 잡으시고 그 많은 자갈을 다 씻을 때까지 물을 뿌려 주셨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시면서 저희에게 힘을 주시고 격려해 주시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슬성신 은혜가 너무나 아름다워
1972년 6월 무렵 기장신앙촌의 여러 건물이 완공되고, 1동 건물에 있는 대예배실에서 새벽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등단하신 하나님께서 찬송을 인도해 주시는데 하나님 손에서 뽀얀 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찬송에 맞춰 손을 좌우로 움직이실 때마다 실처럼 뽀얀 줄기가 선을 그리며 움직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워 계속해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 손끝에서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이렇게 보여 주시는구나!’ 하며 감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75년 경으로 기억됩니다.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여 많은 신앙촌 주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시며 안찰해 주신 후 “고향이 어디지?” 하고 물으셨습니다. 안찰 받는 중에 갑자기 물으시니 긴장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내 고향은 양산인데…’ 하고 생각만 하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그 생각을 들으신 것처럼 “아, 여기”라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기장신앙촌이 원래 경상남도 동래군에 속해있었지만 1973년부터 양산군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마치 제 고향이 양산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것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을 전에도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사소한 생각이라도 다 알고 계시니 마음과 생각을 조심하며 죄짓지 않아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하게 됐습니다.
아름답게 피어나신 어머니 모습
저와 함께 기장신앙촌에서 지내셨던 어머니는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되셨습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신 후 방에 들어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셔서 얼굴에 살이 빠지고 수척한 모습이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볼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피부는 뽀얗게 피어 살아계실 때보다 더 예쁜 모습으로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순간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잊고 손을 잡았는데 그 손이 차가워서 그제야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례반 권사님이 오셔서 어머니 입에 생명물을 한 숟갈씩 넣어 드리자 흘러나오는 것 없이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생명물로 깨끗이 닦아 드리니 피부색은 더욱 뽀얗게 피어나고 양볼과 입술에 고운 혈색까지 감돌아서 그렇게 예쁘실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전쟁통에 아들을 잃고 가슴 앓이를 하셔야 했지만 하나님을 깨닫고 은혜를 받으신 후로 매일매일 기쁘게 사셨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이슬은혜로 함께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며 깊이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크신 하나님 사랑에 감사드려
저는 기장신앙촌에서 제과 공장과 메리야스 공장의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6년부터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말주변도 없고 부족할 뿐이지만 신앙촌 제품을 믿고 찾는 분들이 계셔서 지금까지 기쁘게 소비조합을 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던 시간을 돌아보면 노력하고 애쓴 시간을 모두 기억해 주셨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건설대로 일할 때 동료들은 열의도 대단하고 일도 무척 잘했는데 저는 느리고 힘도 약해 늘 죄송할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제가 가진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주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깊으신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크신 하나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바다를 먹물로 삼아 하늘에 쓴다 하여도 우리 주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는 찬송가를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