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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제단’, 천부교 첫번째 교회(5)

2만명 수용할 제단 건축을 준비
발행일 발행호수 2069

서울전도관 6개월만에 장년 4천여명으로 늘어 2만명 수용할 제단 건축을 준비

1956년 7월7일자 신앙신보는 1면 기사에서 1956년 당시의 원효로 전도관의 발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심야의 등화와 같은 역할로 교계에 나타난 초교파적인 하나님의 제단 서울 전도관은 창설 이래 일로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벌써 4천여명의 교우가 운집하고 있다. 앞으로의 증가될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바 이에 따라 불원장래에 5만명 수용의 대 전도관을 계획하고 있고 근일 2만명 수용 가능한 전도관 건설을 기공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교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금반 서울 임시 전도관에서는 제2회 신임위원 위임식이 성대히 개최된 바 있었다.`

즉 원효로 서울 전도관이 개관된지 6개월 만에 장년만 4,000여 명이 넘었다는 사실과 서울 전도관 신임 임원으로 박동길 장로 등 5명의 장로와 11명의 권사, 290명의 집사 등 도합 301명을 새로 임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새 임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이 충만한 원효로 전도관을 가일층 부흥시키는 한편 진리 앞에 난무하는 마귀들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어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한 사업에 매진할 것`을 결의 하였다고 하였다.

또 1956년 8월 6일자 신앙신보에 의하면 방학을 맞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일주간 원효로 전도관에서 ‘어린이 심령부흥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성과로 어린 심령들이 흡족한 은혜를 받은바 있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 어린이 심령부흥회는 주일학교 부장 손선보 전도사 등이 강사로 나서서 7월 30일 시작되었는데 전후 2부로 나누어 일부는 9시 30분부터 10시 40분까지, 2부는 11시부터 12시 30분까지 예배를 보았으며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남자 322명 여자 476명 도합 8백여명의 많은 수가 참석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 갔다.
손선보 전도사는 에베소 4장 22절을 읽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제목으로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어린이들이 새사람을 입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하며 사회에 공헌하여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다시 조국철 승사(덕소신앙촌)로부터 원효로 구제단 시절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 후 기성교회 총회에서는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참 은혜를 받은 교인들만 원효로 구제단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원효로 구제단에 다녔는데, 어느 새벽예배에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찬송가 95장을 장시간 인도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너희를 찾으시는데 왜 의혹을 하면서 오지 않나. 온 세상 죄 담당한 하나님은 죄 많은 자 불러서 구속하네’ 이 찬송을 계속 부르시면서 하나님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들도 그 간구하시는 애절한 모습에 흘리시는 눈물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채 덩달아 울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집에 와서도 하나님 모습이 생각나 찬송가 95장을 부르며 밤을 지새우곤 하였습니다.`

장일천 관장(67세. 기장신앙촌)의 증언을 들어본다.

`그때 교계에서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장로님을 직접 만나뵈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서둘러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수소문 끝에 장로님께서는 충무로에서 공장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계시지 않고 원효로 3가에 가보면 장로님 자택이 있고 그 옆에 큰 집회 장소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원효로에 가서 헤매다가 장로님 댁을 찾았습니다. 일러준 대로 집 옆에는 바닥이 마루로 된 큼직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원효로 구제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찰부터 받으라 하여 누웠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눈으로부터 시작하여 배로 내려오는 순간 뱃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시원한 물이 뱃속에서 계속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희한한 체험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졌으며 기쁨은 물밀듯 넘쳤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성령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곳을 떠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전주로 내려가지 않고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구제단 예배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계수 前 교역자(78세. 기장신앙촌)의 증언이다.

`그러던 중 1956년 4월 중순경 어느 날이었습니다. 인천에 사는 시누이가 저희 집에 찾아와 하는 말이, ‘박태선 장로님 부흥회에서는 불도 받고 병도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효로 박 장로님 자택에 사람들이 모여 같이 예배를 드린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저에게 함께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이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이렇게 앓아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기도 하여 시누이의 부축을 받고 원효로 박 장로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를 타고 원효로로 가는 동안 제 마음속에는 왠지 모르게 기쁨이 넘치면서 평안해지는 것이었습니다.일찍 서둘러 나왔지만 신당동에서 원효로로 가는 길을 몰라 버스를 여러 번 탔다 내렸다 하다 보니, 저희가 박 장로님 자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예배가 이미 시작되어 설교 말씀을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예배실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고, 예배실 밖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박 장로님을 한 번이라도 뵈려고 창가로 가 겹겹이 둘러 있는 사람들 틈에 간신히 서 있는데, 고개를 이리 빼고 저리 빼도 박 장로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들려오는 박 장로님의 설교 말씀은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시누이가 박 장로님이 밖으로 나오셨다고 가리켜 주는데도 사람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박 장로님을 못 뵙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도 시누이와 함께 원효로로 찾아갔습니다. 그날도 역시 예배실 안은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저는 힘이 없어 현관에 쪼그려 앉고 시누이는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한참 드리는 중에 매우 향기로운 냄새가 제 코를 여러 번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백합꽃 냄새도 아니고 과일향도 아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좋은 향기였습니다. 저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누이에게 말하니, 시누이가 하는 말이 ‘언니, 그게 향취야. 은혜 받는 거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도관에 한 달이라도 다녀볼 수 있을까?’ 하고 저 자신도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전도관에 다니면서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안을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점점 건강을 되찾게 되어 집안일을 제가 도맡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아이를 업고 저희 집 신당동에서 남산을 돌아 원효로까지 걸어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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