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검색

검색결과

"#천부교 역사 그때 그 시간"태그에 대해 총 9건이 검색되었습니다.

1956, 57년 성동원두를 흔들었던 전도관체육대회의 함성

1956, 57년 성동원두를 흔들었던 전도관체육대회의 함성

동대문 운동장(서울운동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서울시는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한 자리에 공원과 월드디자인플라자를 짓는 ‘동대문 운동장 공원화’사업에 대한 계획을 13일 밝혔다. 우리 나라 문화, 체육, 기타 많은 역사가 남아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서울운동장인데 그곳에는 천부교 역사의 초창기 전국 전도관 교인들이 함께 모여 체육대회를 열어 전도와 화합의 함성을 드높이 울렸던 곳이기도 하다. 1956년 10월 16, 17일 […]

1957년 4월 제2회 전국 전도관 대항 체육대회 자전거 경주

1957년 4월 제2회 전국 전도관 대항 체육대회 자전거 경주

1952년 5월부터 미국 공보원이 제작했던 ‘리버티 뉴스’는 1967년 ‘대한뉴스’에 그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16년간의 한국 현대사를 필름에 담았다. 극장 영화 상영전에 방영되던 리버티 뉴스는 국내외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미군 소식 등 당시의 사회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리버티 뉴스 500회에는 1957년 4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서울운동장에서 있었던 제2회 전국 전도관 대항 체육대회의 자전거 […]

전국 전도관에서 빈민 위한 ‘공민학교’ 열어 무료 교육

전국 전도관에서 빈민 위한 ‘공민학교’ 열어 무료 교육

지금은 획일화된 교육이 싫고 공교육에 염증을 느껴 대안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실정이지만,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가정 형편상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온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1950~60년대에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청소년들에게 초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던 ‘공민학교(公民學校)’,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실시하는 ‘고등공민학교’ 제도가 있었는데 천부교에서 이 교육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공민학교는 1946년 […]

배움의 기회를 통해 신앙의 길을 알게 돼

배움의 기회를 통해 신앙의 길을 알게 돼

나는 전남 구례구 역전 안동네에 살았다. 초등학교는 2키로 떨어진 곳에 중학교는 7키로 떨어진 곳에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구례 읍내에서 구례전도관 전도사님이 이 마을 저 마을 자전거로 다니시며 학생들을 모집했다. 이장댁에서 마이크로 온동네에 광고를 했다. “무료로 가르쳐주는데 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학교에 못간 애들도 많았고, 나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

‘낙도의 상록수’로 소개돼 청와대까지 방문

‘낙도의 상록수’로 소개돼 청와대까지 방문

전남 신안군 도초도 수다리 전도관에서 한발리에 전도관을 개척하여 나는 1966년 1월 한발전도관에 부임하게 된다. 이후 이곡리에도 전도관을 개척하고 세 곳에서 공민학교를 세워 수업을 해나갔는데 학생 수가 자꾸 불어나가자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서서 자발적으로 연서하여 당터라고 아끼던 큰 땅을 희사하겠다고 했다. 학교 건물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시 신앙촌에서 생산하던 슬레이트며 목재 등 그 먼 […]

‘하나님의 은혜로 핀 시신을 뺏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핀 시신을 뺏겨서는 안 된다’

때는 1987년 재야 민주화 운동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8월 9일,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 더위로 푹푹 찌는 여름날 오후. 청주시 남문로 중앙공원에서는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회장.허종현. 성공회신부)주관으로 ‘민주정부수립과 민족통일을 위한 한마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집회가 무산되자 이 대회에 참석하려던 2백여 명의 청년회원과 대학생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며 대치했다.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시위대가 분산되던 중 시위대 일부가 음성경찰서 소속 지프차를 […]

‘은혜로 핀 시신을 정치적 제물이 되게 할 수는 없었죠’

“조환동이는 축복일에 갈 때면 버스에서 노래를 잘 불러 교인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던 재간둥이었지요.” 조환동 군의 잘 핀 시신을 데모대에게 내 줄 수 없어 끝까지 지켜냈던 관장들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제 데모대에게 맞아 죽는구나”라고 각오했었다고 했다. 시위대는 노제를 지내며 운집한 군중을 선동 하려고 발인 예배를 마친 조환동 군의 관을 빨리 내놓으라고 불같이 독촉을 했고 예배를 인도하는 […]

‘국토 건설의 표본’ 신앙촌 전시회

‘국토 건설의 표본’ 신앙촌 전시회

1957년 11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소사 신앙촌은 외부의 도움과 원조 없이 자력으로 일군 신앙인의 마을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플라스틱 파이프를 가설했고 깨끗하고 산뜻하게 지어진 주택이 있는 신앙촌은 건설의 신화와 더불어 경제개발을 서두르고 있던 당시 국내 상황에서 개발 모델이 되기에 충분했다. 1961년 5월. 신앙촌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때이지만 당시 시공관에서 열린 ‘제 1회 국토 건설 이념 보급 […]

당신의 신앙촌은…

당신의 신앙촌은…

지난해 우리나라 GNP는 29,899달러였다. 1961년 GNP는 100달러. 지금으로 부터 거의 반 세기 전 한국의 모습은 너무도 가난하고 초라했다. 그와 대비해 당시에 건설된 신앙촌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눈을 의심할만큼 경이로웠다. 오죽했으면 국가 기관에서 ‘신앙촌 전시회’를 가졌을까?

<< < 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