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묻다] 신의 작동을 포기한 집단을 종교라 부를 수 있는가?
진리를 묻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2>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는 통계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삼스러운 것은 그 속도와 성격이다. 불과 수십 년 사이, 종교 없음은 주변적 선택에서 사회적 다수의 위치로 이동했다. 미국 코넬대학교 공동연구진은 최근의 종교 이탈이 단순한 세속주의의 확산이 아닌 신앙이라는 틀 자체와의 결별 선언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 사원, 회당 안에서 신을 찾지 않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 신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탈 앞에서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신이 실제로 세계에 개입하고 있으며, 그 흔적이 종교 공동체 안에서 확인 가능하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초월적 개입이 지속적·반복적으로 나타나고, 특정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다수의 신도에게 반복적으로 관찰되고, 체험과 증언을 통해 검증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된다. 신의 작동을 입증하는 것, 그것이 충족되어야 절대적 진리가 종교 안에 있음을 사람들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오늘날 종교는 대답을 회피한다. 초월적 신의 증거를 내세우기보다는, 신을 믿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설명하는 데로 물러선다. 종교가 말해야 할 ‘영적인 것’은 어느새 심리적 안정, 공동체적 유대, 삶의 태도라는 안전한 영역으로 이동했다. 신의 작동 대신 믿음이 주는 심리적 위안만이 남은 상태를 그들은 ‘영성’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영적 삶이라고 명한다.
종교는 왜 이 지점에서 물러서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신의 작동을 주장하는 순간, 종교는 검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가? 그 작동은 반복 가능한가? 유사한 상황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이 질문들은 종교가 가장 피하고 싶은 질문들이다. 종교는 이 질문들 앞에서 설명 책임을 떠안게 되고, 더 이상 논리적 방어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신자들 역시 불편한 침묵과 마주한다. “당신은 종교 안에서 신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선뜻 답하지 못한다. 신을 믿는 것과 신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침묵 뒤에는 더 불편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었던 것인가.”
만약 신의 작동이 실재한다면 설명을 회피하지 않고 분석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주장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영성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효용으로 대체한 집단은 존재론적 정의에서 더 이상 종교라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초월을 상실한 종교의 잔존물에 가깝다. 그들의 핵심 명제가 “신이 세계에 작동한다”에서 “신을 믿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로 바뀌는 순간, 신은 종교의 존재 이유가 아닌 장식품이 된다. 종교가 스스로의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신의 작동에 대해 끝내 답하지 못하는 제도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침묵은 종교에게 가장 안전한 생존 전략이었을지 모르나, 그 침묵은 동시에 신의 실재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의 실제 작동 없이도 유지되는 집단을 계속 종교라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