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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집회 방해 난동사건(1)

하나님의 천막집회 전주개최 못하도록 범교파적으로 집회방해 음모 꾸며
발행일 발행호수 2080

1955년 시작된 하나님의 천막집회에서 놀라운 이슬성신의 은혜를 목격한 기성교회 목사들은 이 은혜가 전무후무한 것이요, 이 은혜를 내리는 존재가 단순한 ‘불의 사자’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오히려 이단(異端) 시비를 걸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원효로 구 제단으로 밀려오던 1956년 하나님께서는 불철주야로 전국을 순회하시며 집회를 인도하셨다. 이때 전주에서는 기성교회의 모든 교파가 총동원되어 하나님의 전주 집회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전주에 있는 각 교파 지도자들은 이번 기회에 기어코 박태선 장로의 부흥운동을 좌절시키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전주시내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모든 교파를 망라하여 박 장로님을 대항하는 범교파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치밀하게 대책을 짜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전주집회는 1956년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전주시 노송동 공터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전주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서울까지 들려왔으나 과거의 예로 보아 비난과 야유, 소요, 삐라 살포 등을 예상하였을 뿐 그 이상의 난동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1956년 6월 11일부터 불의 사자 박 장로님이 전주에서 부흥집회를 하신다는 벽보가 붙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 목사가 광고하기를, ‘이번에 박 장로 집회에 한 사람도 절대 참석해서는 아니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총회와 노회에서 박 장로가 꼼짝 못하도록 성경에 지식이 많은 사람과 신학생, 성경학교 학생, 학생연합회 임원들, 전북 노회에 속한 목사, 장로, 여러 교인들이 모두 동부교회에 모여서 연합예배를 보고, 우리 다 같이 전체가 가서 성경으로 토론하여 박 장로를 꺾어 버리고 전주만큼은 박 장로가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박 장로가 전주에 와서 서는 날인 6월 11일 본 교회로 와서 기도들 많이 하시고 마음도 준비하시고 성경도 많이 보고 질문할 성경 제목도 많이 연구들 하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영곤 간증기)

동부교회 고성모 목사가 총지휘  야유, 질문, 투석조를 조직 사전훈련

그리하여 전주시내 각 교회 목사들은 성경에 유식하다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박 장로님을 대항하는 싸움에 나가는 ‘출정(出征)예배’를 각 교회에서 보고 다시 동부교회로 집결하여 합동으로 예배를 보기로 하였다. 6월 11일 밤 7시 전주 동부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동부교회에는 목사가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노회장 고성모 목사, 또 한 사람은 김지세 목사였다.

“곧이어 고성모 목사의 사회로 예배가 시작되었으며, 김지세 목사의 설교가 있은 후 성결교회 오 목사가 박장로님 집회장소에 가서 어떻게 행동하라는 주의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합동예배를 마친 우리는 박 장로님의 집회 장소로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정영곤 간증기)

각 교파 교회별로 ‘출정예배’를 먼저 보고 다시 동부교회로 집결하여 ‘합동예배’를 보면서 전의를 다지고 행동요령을 교육받은 후 그들은 하나님의 천막집회를 저지하기 위해 ‘행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회장에 가서는 성경질문 조(組), 야유 소란 조, 투석 조 등을 조직하여 각 조장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도록 하였다. 말은 성경토론이었지만 사실은 천막집회를 폭력으로 저지할 난동자들을 조직했던 것이다.

난동자들의 총 지휘는 전주 동부교회의 고성모 목사가 맡았는데 그는 전북노회 소속 장로교 45회(1960년)총회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리고 행동대원으로는 신흥고등학교 학생 다수와 한예장 성경고등학교 학생 다수가 동원 되었다.그러나 1956년 6월 11일 저녁 그들이 집회장에 도착했을 때 박 장로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이 동선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고성모 목사의 인도로 집회 장소로 의기양양하게 몰려갔습니다. 박 장로님이 성경 상으로 조금이라도 어긋난 말을 하면 집회고 뭐고 아예 전주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 버리겠다는 굳은 맹세를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서 가슴을 조이면서 집회 장소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박 장로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청년 한 사람이 ‘이동선 목사님 말씀 하나 묻겠습니다.’ 하고 소리치며 손을 드니, 이동선 목사의 대답이 ‘저는 자세히 모르고 내일 밤이면 박태선 장로님이 오시니 물어보시오.’ 하고 단에서 내려오자 우리의 기대는 어그러지고 흥분은 높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교인들과 성경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집회장 내에 분산 배치되어 설교방해, 야지, 성경질문, 고성, 폭언, 폭력행사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박 장로님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 목사가 인도하게 되니 반문, 질문, 폭언 정도로 그 날은 해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영곤 간증기)

박 장로님께서는 6월 12일 31열차 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셨는데, 차중에서 전주에서 시무한다는 이모 목사가 여러 사람 앞에서 고성으로 힐난하며 박 장로님께 대어드는 일이 일어났다. 박 장로님께서는 온유한 태도로 이 목사의 부당성을 만류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토론할 것을 권면하였다. 전주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열차 안에서부터 이미 전초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설교집2, 27p)

마침내 1956년 6월 12일. 전주 노송동 공지에 세워 진 대형 천막에는 목사들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3만여 명의 청중이 구름같이 운집하여 박태선 장로님이 도착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성모 목사의 지휘하에 집회를 방해하려는 청년들과 성경학교 학생들도 집회장에 모여들어 포진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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