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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4) 부산공설운동장집회

부산 공설운동장집회 자리, 지금은 파란 잔디깔린 구덕운동장
발행일 발행호수 2142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은 6·25동란기간중 1950년 8월 18일부터 휴전하던 해인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였다.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이 모여들며 대거 정착하여 1955년 부산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어선다.
1955년 5월 12일부터 19일까지 안동의 낙동강변 백사장에서 가졌던 안동집회를 마치고 사흘 뒤인 23일부터 하나님은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네번째 천막집회를 여신다.
한 번 천막을 치고 걷는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어 한 번 집회를 하시면 보통 1주일을 하셨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라 사흘 뒤에 부산 공설운동장에 천막을 다 치고 집회를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나는데…
아무튼 집회가 열렸던 기간인 24일 부산 공설운동장을 찾았다.
 
 
부산의 공설운동장은 1982년 개명되어 구덕운동장이라고 한다.
 
마침 찾아간 날은 부산국제청소년축구대회 기간 중 한국 대 호주의 경기가 있는 날로 낮부터 방송사에서 중계용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었고 2시부터는 행사가 있어서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찾은 시각은 낮 1시. 50년전 그 자리에서 사진만 찍고 나온다고 겨우 설득하여 구덕운동장이 공설운동장이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젊은 진행요원을 대동하고 ‘잔디에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엄포에 트랙에서만 간신히 사진을 찍고 나왔다.
 
그럼 다시 1955년으로 돌아가보자.
 
서울에서 시작하여 안동을 거친 하나님의 집회 소식은 이미 부산에도 나있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는 죄타는 냄새가 나고 향취가 진동한다는 얘기를 몇 달 전에 듣고 참 신비스럽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설운동장에서 박장로님이 집회를 하신다는 벽보를 보니 ‘직접 가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집회를 알리는 벽보를 보고 집회에 갈 생각을 했다는 서일환권사(74세. 미국거주)는 공설운동장집회에 관해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날 공설운동장을 찾아가니 한창 천막을 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 옆 큰 창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여 우리 일행도 사람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은 기대하던 하나님께선 나오시지 않고 목사님 한 분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박 장로님이 오셨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처음 뵈었는데,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집회 삼일째 되는 날부터 공설운동장에 쳐 놓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삼일째부터 천막 안에서 집회를 하게 되신 것이다.
 
넓은 운동장 전체에 쳐놓은 대형 천막을 보고 집회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그 큰 규모에 놀라게 되는데, 당시를 정리한 신앙신보(1956.5.21. <협회창립1주년>기사)를 보면 “부산공설운동장에 선 천여평의 가설천막은 범죄자의 개전을 촉구하는 도가니였던 것이다. 동란으로 밀집하여 갖은 죄악의 소굴이 된 이곳 부산에 있어서 이 집회는 저들의 경성(警醒)이 되었으며 동시에 희망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집회에 참석하게 된 경로는 서일환권사처럼 벽보를 보고 집회를 찾아가거나 소문을 듣고 찾아간 사람들도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의 광고와 권고를 듣고 찾아가게 된다.
 
최정숙집사(64세. 죽성교회)는 “당시에 어머니가 물 한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아주 고생을 하고 계셨는데, 보건소에서는 위가 다 녹아서 형체를 알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하루는 다니던 구덕장로교회 박목사님이 ‘공설운동장에 박태선장로님께서 오셔서 집회를 하시니 모두 참석하라’고 해서 집회가 열리는 날 새벽에 교회 어른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집회 장소로 갔습니다.” 그 때 학생이던 최집사는 새벽예배 동안 어머니가 앉을 기력이 없어 누워 계신 것을 보고 등교를 했었다고 한다. 집회 기간 동안 참석한 최집사의 어머니는 그 집회에서 은혜 받고 병이 다 나았다고 했다. “다시 그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다 녹아있던 위가 정상인과 똑같고 한 뼘 밑으로 늘어져있던 대장도 제자리에 있다는 거예요. 담당 의사는 몇 주 전에 찍었던 엑스레이 사진을 꺼내 와서 비교하며 자신이 절대로 오진을 했던 것이 아니라며 흥분했어요. 하나님 집회에 참석한 후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이건 기적이야’를 연발하며 집회에 갔다 온 후 완쾌된 것을 인정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죄 타는 고약한 냄새를 맡고 또 이 세상에서는 맛보지 못한 좋은 냄새를 맡기도 하며 단상에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거나 강대상부터 천막 맨 뒤쪽까지 불줄기가 전깃불같이 쭉 뻗어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단상에 떨어지는 불덩이를 보고 불이 날까봐 신발주머니를 부여잡고 밖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오정자관장(66세)은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집회장에 갔는데 하나님 서신 단상 위로 불덩이가 떨어지는데 마치 종잇장이 나풀거리듯 떨어져요. 그 때 쳐놓은 천막이 군인천막인데 비가 새지 말라고 기름 칠을 해놨어요. 불덩이가 떨어지면 그대로 불이 날테니 저 불덩이가 어디로 떨어지나 주의깊게 그것만 보고 있었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생각도 안나고 불이 나면 튀어 나가려고 신발주머니를 꼭 잡고 있는데 불덩이가 분명히 떨어졌는데도 불이 안나는 거예요. 그래서 불덩이가 떨어진 자리라도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천막 밖으로 나와서 천막을 삥 둘러서 찾아보는데 어디에도 흔적이 없는 거예요. 말씀을 다 마치셔서 집에 왔는데 집회에서 본 불덩이 때문에 잠도 안오고, 다음날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장 집회장을 찾아갔어요. 어제는 저녁밥 먹고 와서 어두워서 못 봤으니 오늘은 환할 때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샅샅이 찾아봤으나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이 난 자리는 흔적도 찾지 못하고 집회에 참석해서 앉았는데, 그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다음날 또 올 것을 마음 먹고 돌아갔다가 집회 마지막 날 참석한 오정자관장은 “그날은 소낙비가 심하게 와서 천막이 지탱하기 힘들게 되자 앞에 있는 간장 공장 자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서두르지 말라, 다 올 때까지 기다려 줄테니 천천히 오라, 비 맞아 죽는 법은 없다’고 하시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옮겨올 때까지 기다리시어 그곳에서 마지막 날 집회를 하셨습니다. 비는 맞았죠, 그많은 사람이 실내에 빼곡하게 들어왔으니 그야말로 악취가 날 상황이었죠. 그러나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바로 그 자리에 부산의 첫번째 전도관인 대신동 전도관이 서게 된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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