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9>동아시아로 번진 노예무역과 조선을 덮친 전쟁의 지옥②
▣ 임진왜란, 한반도를 지옥의 참상에 몰아넣다
1592년 임진년에 발발하여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한다. 이 가운데 1597년 정유년에 일어난 재침략 전쟁이자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쟁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따로 명명한다. 그런데 이 정유재란 시기에 왜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와 전쟁의 참상을 모두 목격한 종군 승려가 있었다. 일본의 종군 승려 게이넨(慶念)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라는 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는데, 그의 기록은 정유재란 당시의 참혹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8월 6일, 산도 들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사람을 보면 무참하게 칼로 베어버리고는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묶인 부모는 어린 자식을 걱정하며 울부짖고, 자식은 어버이를 찾아 울며 헤맨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은 난생처음으로 보았다. (野も山も、城ハ申におよはす皆々やきたて、人をうちきり、くさり竹の筒にてくひをしハり、おやハ子をなけき子ハ親をたつね、あわれ成る體、はしめてミ侍る也。)
8월 8일, 고려(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베어 죽여 갈라 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서로 울부짖는 그 탄식은, 마치 지옥의 옥졸에게 형벌을 받는 것과 같았다. (かうらい人子供をハからめとり、おやはうちきり、二たひとみせす。たかひのなけきハさなから獄卒のせめ成りと也。)
8월 16일, 성안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남김없이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城の内の人數男女殘りなくうちすて、いけ取物ハなし。) 8월 18일, 날이 밝아 성 밖을 보니, 길바닥에 죽은 자들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다. (夜明て城の外を見て侍れハ、道のほとりの死人いさこのことし。めもあてられぬ氣色也。)
8월 28일,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도 산야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베어 죽인 모습이 차마 다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가는 길마다 베여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여…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이가 없구나. (道すから、路地も山野も男女のきらいなくきりすてたるハ、二目共見るへきやうハなき也。道すからきられてしする人のさま五體につゝくところなきかな)
11월 19일, 일본으로부터 갖가지 상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인신매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서 달아나지 못하게 밧줄로 목을 묶고 끌고 다닌다.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몰아세우고 마구 두들겨 패는 모습이 마치 지옥의 하수인인 아방나찰(阿傍羅刹)이 죄인을 고문하는 것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생각되었다.(日本よりもよろつのあき人もきたりしなかに、人あきないせる物來り、奥陣ヨリあとにつきあるき、男女老若かい取て、なわにてくひをくゝりあつめ、さきへおひたて、あゆひ候ハねハあとよりつへにておつたて、うちはしらかすの有様ハ、さなからあほうらせつの罪人をせめけるもかくやとおもひ侍る。)
<참고자료3>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서 일어난 노예매매의 참상 – 자료화면 출처: KBS <역사스페셜> 임진왜란 2편, 일본승려 정유재란 종군기 “산도 들도 불타고 있었다” /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1부
그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노예매매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는 불과 10년 전, 오무라 유코가『규슈 원정기』에 기록했던 일본에서의 그 참상과 흡사하다. 1998년 12월 11일자 부산일보 기사〈임란 조선인의 수난현장-8 노예시장〉에서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가미가이토 겐이치 교수의 저서『공허한 출병』을 인용해 “일본 상인들은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행위를 배워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 매매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전비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왜군 지휘부는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거나 군수물자와 교환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1996년 9월 6일 7시 30분에 방영된 KBS <역사추리> 34회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에서는 임진왜란이 영토침략전쟁이 아니라 사실상 노예전쟁이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해외로 팔려나간 조선인 노예의 수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려웠다. 전쟁 통에 작성된 포로 명부가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포르투갈 무역망을 따라 마카오·인도·유럽 등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을 수 있는 자는 누구든 일본으로 잡아가 경작을 대신 하게 했다”는 선조실록의 기록, “조선의 남자 포로가 3~4만이다. 늙은이와 여자를 합치면 그 곱절은 될 것이다”라는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의 기록, “사쓰마(現 가고시마)주에 3만 7백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다.”는 광해군 일기의 기록,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스쿠도(scudo·이탈리아 옛 화폐단위), 페루 노예가 400스쿠도인 것에 반해 조선인 노예는 2.4스쿠도에 불과했다는 카를레티의 동방여행기(Viaggi di Francesco Carletti) 등.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러 사료들을 종합하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를 약 20만 명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임란 당시 조선인들의 비극은 노예로 팔려간 데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잔학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에도 학살은 있었다. 그러나 2차 침략인 1597년 정유재란에 이르러 그 성격은 차원이 달라진다. 이전의 학살이 전투 과정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약탈과 살인이었다면, 정유재란의 학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가 차원에서 내린 조직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조선의 문신 강항이 남긴『간양록(看羊錄)』에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다.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 놈의 코를 베어올려라. 병졸 하나에 코 한 되씩, 모조리 소금으로 절여서 보내도록 하라. (人有兩耳,鼻則一也。宜割朝鮮人鼻,以代首馘。一卒各一升。沈之以鹽,送于賊魁。)”
코의 숫자는 곧 왜군들의 전공(戰功)이 되었고, 왜군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높이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코를 베어 보냈다. 실제로 한 왜군 부자(父子)는 “남녀와 갓난아이까지 남김없이 베어 죽이고, 코를 베어 그날그날 소금에 절였다.”며 이를 자신들의 전공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코 베기 현장을 직접 목격한『난중잡록(亂中雜錄)』의 저자 조경남은 “사람만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고, 정유재란을 직접 겪은 실학자 이수광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 사전『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코는 베어 없어도 목숨은 건져 코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도 이 참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표현, 그리고 아이들에게 조심하라며 겁을 줄 때 쓰는 ‘에비!’라는 표현이 코와 귀를 베어 가던 일본군, 즉 ‘이비(耳鼻)야가 온다’는 경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회자된다.
■ 코 영수증 번역
받은 코의 수 1,551개 확실히 받았습니다. 1597년 9월 13일
하야가와 나가마사 나베시마 가쓰시게 귀하
한반도 전선에서 벤 코를 히데요시의 코 수집관에게 인도할 때 일본군 부대장은 반드시 코 영수증을 받아두었고,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그 수를 확인한 뒤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오늘날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과 감사장을 살펴보면, 남원성 전투가 있었던 1597년 8월 15일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코 베기가 자행되었는데, 왜군 무사 오코치 히데모토가 기록한『조선물어(朝鮮物語)』에 따르면,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1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 또한『조선물어』는 교토 동쪽 대불전 부근에 코들을 쌓아 묻고 석탑을 세워 누구나 볼 수 있게 전공을 기렸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코 무덤(鼻塚)은 현재까지도 교토에 남아 그 참상이 실제로 벌어진 역사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렇게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인 정유재란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며 비로소 끝을 맺는다.
■ 코 감사장 번역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13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하였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1597년 9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마쓰 다다도요(島津忠豊) 귀하(출처: 조중화,『다시 쓰는 임진왜란사』,학민사)
▣ 가톨릭이 남긴 동아시아의 상흔과 배상 논의의 빈자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의 상처를 기억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두 나라 모두 가톨릭을 국가의 미래를 무너뜨릴 사교(邪敎)로 뇌리에 깊이 새겼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 전쟁과 인신매매는 기리시탄 세력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키웠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 정책이다. 히데요시 사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막부 직할령에 기독교 금지 조치를 내렸고, 이어 1613년 말에는 ‘선교사 추방문’을 통해 선교사 추방과 금교 조치를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했다. 선교사 추방문에 의하면 기독교를 금지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리시탄의 무리가 마침내 일본에 들어왔다. 그들은 단지 상선(商船)을 타고 와서 재물을 교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함부로 사악한 법을 널리 퍼뜨려 바른 법을 미혹하게 하고, 나라의 정치를 바꾸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는 큰 재앙의 싹이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저 선교사의 무리는 의를 해치고 선을 파괴한다. 처형자(순교자)를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절을 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악한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둘러 금하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국가의 우환이 될 것이다. (爰吉利支丹之徒党、適来於日本。非啻渡商船而通資材、叨欲弘邪法、惑正宗、以改域中之政号、作己有。是大禍之萌也、不可不制矣。(…) 彼伴天連徒党、皆反件政令、嫌疑神道、誹謗正法、残義損善。見有刑人、載欣載奔、自拝自礼、以是為宗之本懐。非邪法何哉。実神敵仏敵也。急不禁、後世必有国家之患。)”
조선 조정도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시간이 흘러 왜와의 국교를 재개하고서도, 가톨릭에 대해서만큼은 극도의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1795년 박장설의 상소문에 의하면, 박장설은 천주교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가정과 제사로 이어지는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집안과 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서양의 가르침이 명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뒤 여러 지역으로 퍼졌고, 끝내 일본의 기리시탄 세력에게까지 전해져 나라를 어지럽히는 혼란과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후로도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하며 천주교를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공경하지 않으려 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의 무리, 통화통색(通貨通色)하는,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이라 비판하며 경계해왔다.
이러한 기록들은 노예매매와 잔혹한 전쟁의 경험이 일본과 조선 모두에게 얼마나 막대한 피해와 공포,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 시작은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이 교회의 축복을 등에 업고 확장한 노예무역망이 대서양을 넘어 동아시아까지 번져 나가면서부터였다. 동아시아에서 노예무역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통로가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전쟁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은 전쟁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고도 인구와 토지, 경제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일본 역시 외세에 대한 공포로 인해 쇄국 정책의 길로 들어서면서, 약 이백 년간 세계와의 교류에서 크게 후퇴해야 했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학살되거나 끌려간 이들, 그 후손들이 겪은 차별과 빈곤, 전쟁이 남긴 정치·문화적 후유증까지 감안한다면, 노예무역은 두 국가의 미래를 파괴한 범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무역과 전쟁이 아니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재 국제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예무역 피해 배상 논의는 아프리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논의의 범주는 마땅히 동아시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가톨릭이 축복한 노예무역과 전쟁의 여파가 동아시아에 남긴 깊은 상흔은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도, 배상 논의의 대상으로 다뤄지지도 않고 있다. 역사의 책임은 흔히 시대와 여론의 흐름을 타고 그 잘못이 크게 조명된 범위에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명받지 못한 피해까지 양심 있게 성찰하는 것이 마땅한 책임의 자세일 것이다. 노예무역으로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고 다른 나라의 미래를 파괴해 부와 세력을 쌓아올린 자들의 행보를 역사는 계속 지켜볼 것이다.
<참고자료4> 현재까지 남아 있는 코 베기 학살의 증거들
■ 코 베기의 증거, 역사에 남다
코를 베어오라는 간양록의 기록 정유재란 때는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조선인의 코를 베어 보내도록 명령했고, 코의 숫자는 곧 왜군의 전공이 되었다. 이에 왜군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산 사람의 코까지 베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 각지에는 실제로 코의 수량을 확인하는 ‘코 영수증’과 코를 수령하고 장수들의 공을 칭찬하는 ‘코 감사장’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교토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는 코를 묻었던 무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