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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촌 엑슬란 내복

`그건 '산업의 혁명'이었어요`
발행일 발행호수 2275

“방풍복과 더불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내복이다. 웬 내복! 초등학교 다닐 때 빨간색 신앙촌 내복을 입어보고 정말 수십 년 만에 처음 입는다.”

“신앙촌 아줌마가 일주일에 한 번은 산타클로스처럼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집에 들러 맨드라미처럼 붉은 내복과 튼튼한 팬티와 구리무를 내놓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촌 빨간 내복. “왜 빨간색이어야 했나?” 라는 질문에 여러가지 설이 제기가 된다. 당시에는 염색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빨간 색이 가장 손 쉬웠다. 혹자는 빨간 색에는 따뜻한 느낌이 있어서 추운 겨울에 더 선호하는 색상이 되었다. 또 다른 이는 내복이 고급품이던 시절 소매 끝으로 삐죽이 나오는 내복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색을 쓴 것이다. 혹은 저멀리 고구려 벽화까지 들먹이며 붉은 색에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는 등 빨간색 내복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빨간 내복으로 유명한 신앙촌 엑슬란 내복-합섬섬유의 최초 제품이라 그 원사를 공급하던 곳에서 빨간 색과 회색으로만 실을 뽑았다고 하니까 좀 싱거운 결말이 되려나?

내복이 흔하지 않던 시절. 엑슬란 내복이 나오기 전에는 무엇을 입었을까?
황순희 관장(송탄교회)의 말에 의하면 “그때 좀 산다는 사람들은 미제나 일제를 입었어요. 국산은 정말 형편없었거든요. 그런데 신앙촌에서 엑쓰란 내복이 나온 거예요. 그건 산업의 혁명이었어요. 산업의 선구자였죠. ‘국산도 잘만 만들면 된다’ 그런 의식을 갖게 한 거죠. 당시에 저의 친지 가운데 한 분이 마도로스였는데 그런 분들은 외제 물품을 구하기 좋은 시절이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그 분한테 외제 물건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신앙촌에서 이렇게 좋은 물건이 나오는데 굳이 외국 것을 사올 필요가 없다’는 거였죠.”

혁명과도 같은 신앙촌의 엑슬란 내복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황순희 관장은 “30대에 사서 지난 해까지 입었는데 아직도 멀쩡해서 올해도 추우면 또 입을 것”이라고 했다.

미제나 일제를 입던 시절에 나온 빨간색 신앙촌 엑슬란 내복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완전히 외제를 밀어내 버렸다
남이 어떤 속옷을 입었는지 대중 목욕탕에 가기 전에는 좀처럼 알기 쉽지 않다. 좀 산다는 집에서 일제나 미제를 입었다면 국산으로 면내복이 있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보온성도 떨어지고 계속 세탁을 하다보면 딱딱해지기까지 했다는데 면내복 앞에 나타난 신앙촌 엑슬란 내복은 마치 강원도 산골의 촌부 앞에 나타난 멋쟁이 뉴요커와 같았다고 한다.

“1969년 서울 금북전도관에서 교역을 할 때였습니다. 겨울에 목욕탕을 갔는데 어떤 사람이 멋쟁이 내복을 입고 활보를 하길래 봤더니 신앙촌 거였어요. 나는 면내복 후줄근한 것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강원도 촌부와 멋쟁이 뉴요커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당시 전도사 월급으론 상당히 비쌌던 기억입니다.” 한일물산 부사장의 증언이다.

신앙촌 엑슬란 내복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 여성용 엑슬란 속치마였다. 말이 속치마지 두툼한 재질로 만들어져 집안에서 엑슬란 속치마만 입고 지내도 홈웨어로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 역시 그 시절 거의 모든 여성들이 갖고 싶어하던 그리고 하나씩은 갖추고 있던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한일물산 부사장은 “제가 전도관 나가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 하시던 이모님 생신에, 전도사 나오고 나서인데 신앙촌 엑슬란 속치마를 선물로 사들고 갔더니 입에 귀에 걸리듯이 좋아하시고는 그날 이후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셨어요”라며 엑슬란 속치마의 인기를 전해주었다.

엑슬란 내복의 전통을 이어 지금 신앙촌에서는 다양한 재료로 품질 좋은 내복이 생산되면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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