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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앙촌 이불

모든 사람을 감싼 '명품 이불'
발행일 발행호수 2282

40년이 넘은 수 이불 겉감만으로도 묵직했다. 1968년에 혼수로 마련한 신앙촌 수 이불의 겉감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손주희씨(66. 강남구 신사동)는 “당시에 최고품이었어요. 웬만큼 산다는 집에서도 이 이불을 해간 사람이 없었어요.” 당시 8기통 콘티넨탈 자가용을 가지고 있던 친정살림을 이야기하는 손씨는 신앙촌 수이불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말했다.

신앙촌상회 압구정점(대표: 송선희)에서는 오픈 기념으로 신앙촌이불 보상판매를 실시하자 고객들은 오래된 이불을 들고와 신앙촌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풀어냈다.

손씨는 시어머니에게 예단으로 드린 장미 수와 본인이 덮던 이불의 국화 수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던 시어머니가 이 이불을 받으시고 참 맘에 들어하셨어요.”

노리다께 12인조 홈세트가 3만원 신앙촌 수 이불 한 채 2만 5천원
40년 넘게 사용하는 신앙촌 담요 8톤 트럭 한대분이 목포시내에 팔려
1971년 결혼 당시 노리다께(일본의 도자기브랜드) 홈 세트 12인조 156피스가 3만원, 12폭 수병풍이 2만원이었다는 손씨는 1968년에 구입할 당시 신앙촌 수이불 한 채 값이 2만 5천원이 넘었다고 기억한다. “하얀 아사에 일본제 레이스가 쭉 달려있었는데 정말 예뻤다”고 말하는 손씨는 “신앙촌의 안목이 참 높아요. 40년이 지나 지금 봐도 얼마나 예뻐요. 당시에 외국을 다니시며 좋은 것을 많이 보셨던 아버지도 신앙촌 이불만큼은 참 곱다고 인정을 하셨어요.”

지금도 신앙촌 담요만큼 따뜻한 게 없다는 양승혜씨(70. 강남구 신사동)는 1966년 시집갈 때, 혼수로 신앙촌 다후다 이불 두 채를 언니가 사주었다고 했다. “핑크색에 장미 수 놓인 것 하고, 노란색 다후다 이불이었어요.” 양씨도 혼수로 해갔던 자수 이불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 “초록색 공단에 연분홍 매화가 수 놓인 건데, 빨아도 빨아도 수 실 하나 안 터졌어요. 색도 그대로였고, 솜은 버려도 수 놓인 것은 가지고 있다가 두 해 전에 버렸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지고 있을 걸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예뻐요.”

양씨는 지금도 사용하는 신앙촌 담요 두 장을 들고 왔다. “이거 지금도 침대에 덮어두는 건데, 색동담요는 내가 쓰고, 꽃무늬 담요는 아들 침대에서 걷어 왔어요.”

양씨는 신앙촌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새마을 운동과 함께 이제야 누더기 옷을 벗게 되는가 싶었을 때 신앙촌에서 좋은 섬유로 옷이 나왔어요. 엑슬란 속치마 밍크담요 등 여러 제품들이 나와서 굉장히 행복했어요. 신앙촌은 명품이죠. 요즘도 그 마음으로 신앙촌상회를 찾고 있습니다.”

역시 혼수로 해온 꽃무늬 화려한 핑크색 담요를 들고온 이애자씨(64. 서초구 잠원동)는 담요를 들고 나오자 남편이 “절대로 주지 말라”고 해서 “보여만 주고 온다”고 안심시키고 나왔다고 말한다.
“신앙촌 아줌마가 와서 신앙촌에서 처음 나왔다며 혼수품으로 사두라고 해서 약혼도 하기 전에 사서 장롱 위에 잘 모셔두었어요. 그 때 신앙촌 아줌마가 ‘최고로 좋은 것, 두고두고 후회 없을 것’이라고 그랬죠. 사람들이 와서 보자고 해서 펼치면 ‘예쁘다’고 탄성이 터졌어요. 오늘 사진 찍어 놓으니까 더 예쁘네요. 하하하.”

이불이 겨울에만 덮는 것이 아님에 여름용 이불이라하여 ‘썸머이불’이란 이름으로 나온 제품이 다양하게 있다. 1988년 전남 목포 시내에는 신앙촌 썸머이불 한 채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고성순 관장(소사교회)은 “그때 8톤 트럭 한가득 썸머이불을 싣고와서 목포 시내에 다 팔았습니다. 각 가정에 신앙촌 썸머이불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신앙촌이불은 참으로 다양하다. 유명한 신앙촌 캐시밀론 이불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극단 자유의 퓨전 연극 “국밥(2007.9 공연)” 을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브라더미싱, 신앙촌 캐시밀론이불 등 시대를 대표하는 소품을 디지털 영상으로 표현했다”고 쓰고있다.

신앙촌 이불의 명성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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