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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다. ‘나도 이슬성신을 체험해 봤으면…’ (수원교회 최채례 권사)

수원교회 최채례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367

찬송가와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다. ‘나도 교회에 다니면 저 사람들처럼 책을 끼고 다닐 수 있을까?’ 학교 공부가 짧았던 나는 책을 끼고 가는 모습이 부러워서 교회에 다니고 싶었다.

서울에 살던 집에 다니던 신앙촌 아줌마는 나에게 취직 시켜주겠다고 했다. 싫다고 했다. 나는 교회만 다니고 시집도 안 갈라고 했다. 이제는 ‘믿는 집안’이라며 중신을 서는 것이었다. 가족이 모두 믿는다는 말에 덕소신앙촌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일요일이 되어 영모님이 오신다고 사람들은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날은 추운데 교회에 일찍부터 나가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아무리봐도 장로교회에서 보던 목사님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아무리 봐도 사람인데 뭘 그렇게 요란을 떠나 하는 마음이었다.

3년간 고된 시집살이에 쏟은 눈물은 한강에 배를 띄우고도 남을만큼 많이 흘렸다. 돌아보면 그때 인내를 배웠다.

수원으로 분가해서 이사왔다. 둘째가 백일이 지나더니 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며 기도를 드려보라고 했다. 교회를 찾아야 했다. 아이 때문에 침을 맞으러 다닌 한의원에서 교회를 찾는다고 말을 했더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덕소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 한의사는 그럼 아무 교회나 안 되고 거긴 전도관을 가야된다며 10리 넘어에 전도관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하나님 설교 하시던 모습을 보는데
손을 움직이시는 대로 손끝에서
뽀얀 줄기가 나와 손을 따라서 흘러

병점전도관을 찾았다. 전도사님은 아이를 보더니 나을 수 없는 병이라며 하나님께 거둬가시라고 기도를 드리라고 한다. 울면서 그렇게 기도를 드렸다. 열 달을 앓고 아이가 숨을 거뒀다. 아이의 팔 다리는 어른 손가락 굵기만큼 빼빼 말랐었다. 전도사님은 하나님께 축복받은 비누로 죽은 아이를 씻겨서 관에 넣었는데, 백일 때의 포동했던 모습이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시신이 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아이가 아팠기에 다시 전도관을 찾고 예배를 다니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 전도관을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아이가 죽은 것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회사에 다니며 일요일 예배만 드리는 일요 교인이었다. 그때 하나님께 직접 축복도 받긴 했으나 별다른 느낌이나 감사함 없이 받았었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말씀을 깨닫기 원하여 기도하며 눈물 흘린 것은 15년 전부터 시작한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면서부터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전도관에 나오기 시작했기에 체험기를 보면 권사님들이 말하는 이슬성신이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러던 중 2009년 성신사모일에 신앙촌에서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설교말씀을 방영하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움직이시는 대로 그 손끝에서 뽀얀 줄기가 나와 따라 흐르는 것이었다. 등 뒤에도 뽀얀 것이 올라왔다. 옆 자리의 권사님에게 저게 무었이냐고 물어도 뭘 보고 그러냐며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신앙촌에서 올라오는 길에 관장님게 여쭈었더니 이슬성신을 보았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뻤다.

새벽예배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깊이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 말씀을 깨달아야 흔들리지 않고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우리 가지들의 구원을 위해 고생하신 하나님 생각에 눈물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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