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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전도-시온공민학교

배움의 기회를 통해 전도 활동까지 활발해져
발행일 발행호수 2486

1950년 6·25 전쟁 후,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문맹률 78%,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인재가 2만 6000여 명에 불과한 지구상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먹고사는 것 다음 순위였다. 어린 나이에도 가족 생계의 일원이 돼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던 아이들에게 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때였다. 이때 정부는 신흥국가 재건을 위해 1946년 시행된 공민교육제도를 국민 계몽을 위한 정책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 배움의 기회, 공민학교
당시 전국에 세워지던 전도관에서는 정부 정책에 앞장서 전도관 산하에 공민학교(초등과정)와 고등공민학교(중등과정)를 설립, 운영했다.

광주, 일곡, 소사신앙촌, 영광, 태안, 왕십리, 흑석동, 보은, 안동, 부산, 남지, 평창, 영산포, 철원, 구포, 거창, 양양, 영동, 공주, 포항, 강진, 거진, 옥산, 동두천, 천안, 함안, 일동, 함평, 음암, 장흥 등 대도시부터 멀리 시골, 작은 섬까지 전국 방방곡곡 전도관 산하에 공민학교가 세워졌다. ‘시온고등공민학교’ 또는 ‘시온중학교’라 불렸던 전도관의 공민학교는 형편이 어려워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학생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당시 신앙신보에는 전국의 공민학교 개교 소식과 활동 기사가 계속 보도되었다.

“군산전도관에서는 2년 만에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스터 할 수 있는 주로 미취학 빈곤 아동들을 위한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중략) 5월 24일부터 학생들을 모집한 결과 1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 6월 5일에 개교식을 올릴 수 있었다.” (신앙신보 1962년 6월 18일자)

1963년 전남 여수의 작은 섬 자봉도에도 공민학교가 세워졌다. “라디오 한 대도 없는 어촌에다가 그나마 자녀들의 교육기관이라곤 초등학교도 없어 40여 적령기 아동들은 이웃섬 월호국민학교로 선편을 이용해서 통학하고 있었는데 자봉전도관의 전도사는 우선 4학년 과정까지 두고 신앙촌의 지원을 받아 유니폼을 사서 입히고 모자까지 쓰게 하였으며 청소를 할 땐 입에 마스크를, 여자들은 앞치마를 두르게 하는 등 실생활 개선의 산교육을 시키고 있다.” (신앙신보 1963년 2월 18일자)

1966년 11월 28일자 신앙신보에는 공주전도관 고등공민학교에서 공주 사범대학 엘렌 테일러 외국인 교수가 전도관의 지역 교육 봉사활동에 감명을 받아 2주에 한 번씩 외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정부의 국민 계몽 정책에 앞장서
전도관 산하 공민학교 설립, 운영

형편 어려워 배움의 기회 적었던
학생들과 지역주민 크게 환영
외국인 교수까지 교육에 동참

공민학교 통해 전도관에대한
고마움과 신뢰 커져 전도까지 활발

# 전도와 공민학교
전도관에서 학교를 세우고 신앙촌 대학생 회원들이 고등공민학교 교사가 되어 무상교육을 실시하자 지역 주민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자 주민들은 마을의 큰 땅을 제공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당시 시온대학생회장이었던 천병렬 권사는 “젊은 패기와 신앙으로 뭉쳐져 있기에 오로지 ‘진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대학생 교사들이 전공별로 세분화해서 가르치니 몇몇 학생들은 정규학교를 다니다가 우리 학교에 편입하기도 했고, 전도까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라고 했다.

1962년 4월, 강원도 철원군 금화전도관 산하 시온고등공민학교를 개교했던 명종구 전직관장은 “소사신앙촌에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을 때 ‘성경을 많이 아는 것보다 사람 됨됨이가 중요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교육을 통한 바른 인성과 인격을 갖춘 신앙인을 키워내라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어 곧장 금화전도관 산하 시온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고 학생들을 모집했습니다. 일주일에 수, 목, 토, 일 4일간 4시간씩 수학, 영어, 한문, 주산, 성경 등을 가르쳤고, 수요일에는 저녁예배가 끝난 후 인근 군부대의 군인들이 교사로 자원하여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이 많아 한글반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종이, 연필이 귀했던 그 시절 학생들에게 선물로 주면 무척 좋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도관에 대한 학부모들의 인식이 좋아져 전도까지 잘 되었습니다. 정말 보람되고 기뻤습니다”라고 했다.

“무취학 빈궁아동들을 위한 자선교육이 전남 영광전도관에서 행하여지고 있어 주민들의 경탄을 받고 있다. 영광전도관에서는 전도에 힘써온 바 새로운 부흥책의 하나로 신앙을 토대로 한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중학과정을 배우는 10대들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일반교육과정으로써 영어, 수학, 주산 등 과목을 재미있게 엮어 향학열을 돋우어 주며 내일의 쓸모있는 일꾼들을 만들고 있는데 이에 따라 학생들의 부흥이 날로 더하여 큰 실효를 거두고 있다. 한편 이에 부응하여 장년들의 전도 열성도 대단하여 새식구들이 계속해서 전향, 입교하고 있다.” (신앙신보 1964년 10월 5일자)

# 공민학교의 추억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팔탄면에 전도관을 개척하여 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한 김태균 전직관장은 하나님께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학교가 세워질 때마다 무척 기뻐하셨다고 했다.

“고등공민학교는 지역 주민 교육 봉사를 통한 전도 사업이었습니다. 더 체계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경기도 교육위원회와 서울 을지로에 있는 문교부를 방문하여 정식 허가를 요청하였습니다. 1968년 2월 전도관 산하 고등공민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68년 3월 1일 당시 면장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교실 4칸, 강당 1칸, 교무실 1칸을 갖춘 꽤 큰 규모의 팔탄시온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학교를 짓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단양시멘트 공장에 요청하여 시멘트 부대에 교단의 명칭까지 인쇄하여 보내주셨습니다. 팔탄뿐 아니라 수원, 매송, 발안, 서인 전도관 산하 고등공민학교를 건축 할 때도 시멘트를 지원해주셨습니다. 개교 한 달 후 1968년 4월 초, 하나님께서 팔탄에 직접 오셔서 집회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때 전국 도관장들과 교육감도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교역자, 교인들은 물론 공민학교 학생들에게도 일일이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또 당시 최고 인기였던 아리아 오르간 두 대를 하나님께서 선물해주셨습니다.”

기장신앙촌 최기만 승사는 전곡전도관 산하 시온상업전수학교 교사로 3년(1975~1977)간 근무하였다. 당시 시온상업전수학교에서는 중학교 과정 3개 반, 고등학교 과정 3개 반이 운영되었고, 수업시간은 주당 36시간에 상업, 상업법규, 상업부기 등으로 실무에 필요한 교과목을 중심으로 약 22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고등공민학교 교사들은 정말 최고의 열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들을 더 성심성의껏 보살폈습니다. 과외지도는 물론, 가정방문, 수학여행 등 다양한 학습지도 활동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가정방문으로 학부모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했고 전도관에 전도되어 나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먹고 살기조차 어렵던 그 시절, 전도관에서 운영했던 공민학교는 형편상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많은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준 것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 전도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체험기 속 고등공민학교 – 박용한 승사 체험기 中

‘교사들도 교회를 짓고 전도하라’학생들 야간수업하며 신앙 강의까지

당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박용한 승사의 신앙체험기(196회)를 그대로 옮겨본다.

“1962년 덕소신앙촌에 신설된 시온 제2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받고 가족과 함께 입주하여 2세 교육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 교사들도 학교 근처에 개척교회를 짓고 전도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학교 근방 마을을 찾던 중, 신앙촌 맞은편 미사리 마을 전도관에 다니는 김 집사님의 소개로 광주군(현재 하남시) 신장리 마을 이장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농촌엔 생활이 어려워 모두들 자녀교육은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형편이라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진학을 포기한 채 시골에 눌러앉아 농사 짓는 마을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신장마을에서 제가 앞장서 야간수업을 하겠다고 계획을 이장님께 말씀드리며, 당장 교실이 없으니 마을회관을 이용하는 것이 어떻느냐고 건의했습니다. 이장님은 쾌히 승낙하며 학생 모집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덕소에서 학교수업을 오후 5시경에 마치고 배로 한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미사리 김 집사 댁에 맡겨둔 자전거를 타고 5시 반쯤 신장마을에 도착하여 6시부터 밤 10시까지 야간수업을 계속한 결과 놀랍게도 한 달이 넘어서는 30여 명의 청년 학생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과 일요일 저녁엔 예배시간을 갖고 신앙강의까지 겸하게 되니 참으로 신나고 보람찬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학과 진도도 빨라졌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주위에서 계속 학생들이 찾아와 수가 더욱 늘어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수업에 열중하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무 늦어 배를 놓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할 수 없이 버스를 이용해 서울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고등공민학교란?
공민학교(公民學校)-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을 초과한 사람에게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1946년 설립한 교육기관. 수업 연한은 보통 3년. 국어, 사회, 산수, 자연, 체육, 음악, 미술, 실과, 반공, 도덕 수업을 받았다.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 초등학교.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에게 중학교 과정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 수업 연한은 1년에서 3년. 공민학교 수업 과정에 가정, 외국어 등이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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