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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교 첫 번째 전도관, 원효로 구제단

발행일 발행호수 2317

초창기 원효로 구제단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 모습. 1956년 초.

1955년 이 땅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 전국 곳곳에서 열린 천막집회와 그곳에 모인 인산인해의 사람들.
그들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은혜를 받고 환호했다.
그러나 환호도 잠시, 기성교회의 전면적 붕괴를 우려한 교권주의자들은 감람나무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여 혹독한 핍박을 가했고 모여왔던 양떼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그러나 온갖 방해와 훼방 속에서도 은혜의 맛을 본 양떼들은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소식에 목말라했고, 그러다 접하게 된 소식. “원효로 박장로님 댁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대요.”
사람들은 원효로로 원효로로 모여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 댁 기도실에서 시작한 모임.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부족하자, 뒷마당에 예배실을 마련했다. 첫 번째 전도관이었다.

11시까지 새벽예배
윤재춘 전직 관장

당시 연세대 1학년에 재학중이던 윤재춘 군이 수소문 끝에 원효로 하나님 댁을 찾은 것은 1955년 12월이었다. 그때부터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어느 날 새벽예배에 나오신 하나님의 제1성은 “나는 목사님들이 돌아오기를 6개월이나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이제 불가불 별도로 시작해야겠다’였다. 전도관이 시작되었고 첫 번째 전도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운영하시던 공장에 달린 기도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가 밀려오는 사람들을 도저히 수용하기 힘들어 뒷마당에 제단을 세우게 되니 구제단이었다. 구제단은 120평 정도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무릎을 펴지 못하고 세워 앉아야 했다. 나중에 들으니 평당 22명까지 빼곡히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그러나 교인들이 점점 더 모이니 도저히 수용을 다 못하여 원효로 전차길에 서서 예배를 드리거나 아니면 뒷편 방죽에 하얗게 앉아서 스피커를 밖에 달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기성교회 목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지 6개월
이제는 따로 시작해야겠다고 말씀하신 첫 번째 전도관
원효로 전차길과 방죽까지 하얗게 인파로 뒤덮이고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먼저 본교회에 가서 주일 낮 예배를 보고 오라고 하셔서 원효로 구제단에서는 오후 2시에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에 사람들이 많이 오자 11시로 시간을 변경하여 예배를 보았다.

새벽예배 때 하나님께서 설교 말씀을 시작하시면 낮 11시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윤 관장은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설교 말씀에 학교 가는 것도 잊고 예배를 드리다가 마치고 학교에 가면 3교시째 수업에 참석하는 때가 많았다.

“한번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사람이 빽빽하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때는 새벽마다 예배를 드리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일이 안수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시기도 하셨어요. 제 동생은 간디스토마에 걸려 각혈을 했었는데 안수를 받고 그자리에서 완치가 되었습니다.”

윤재춘 전직 관장은 구제단에서 그 유명한 ‘유리창이 녹아내리는 이적’을 목격했다.
“1956년 1월 중순 어느 날 영하 18도로 몹시 추울 때인데 유리 창문이 꽁꽁 얼어서 유리창에 성에가 꽉 끼어 밖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행해 보여 주셨는데 해가 비치는 유리창은 얼어있고 해가 비치지 않는 쪽의 유리창 얼음은 이슬성신으로 녹아내리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또 당시의 설교말씀으로 기억나는 것은 세 가지 악을 말씀하시면서 불신자의 악, 믿는 자의 악, 그리고 능을 가진 자의 악이 있는데 능을 가진 자의 악이 최고의 악으로, 방언을 하는 무리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서대문교회

단상에 앉아서
석세조 시온고 교장

당시 25세의 현역 중위였던 석세조 교장. 여동생들이 자꾸 전도관에 가기에 무엇 때문에 가는지 혼을 내더라도 ‘내가 직접 가서 알아나 보고 혼을 내자’고 마음 먹고 원효로 구제단을 찾아갔다. 하사관 몇 명을 대동하여 그곳에 당도하니 창밖에까지 사람들이 빡빡하게 매달려 예배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도무지 앉을 곳이 없어 단상에 올라가 하나님 설교하시는 바로 뒤에 앉았습니다. 동생들이 예배 시간에 송장 타는 냄새가 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단상에 무슨 전기 장치를 해 놓은 것은 아닌지 눈으로 구석구석 살펴보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고, 단상에서 찬송을 인도하시던 하나님께서 얼굴을 뒤로 돌려 세 번이나 유심히 바라보셨는데 속으로 뜨끔하였습니다.”

꿈에 안찰을 받고 다음날 예배에 참석했더니 하나님께서 “어제 밤 1시에서 2시 사이에 꿈에서 안찰 받은 사람 손 들어 보라”하시며 의심하는 사람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을 위해 꿈에 안찰을 해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석교장 선생은 “꿈에 안찰을 받고나니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오는데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성신의 불기둥 보고
소방차 출동
강문형 권사

원효로 전도관에 계속 다니던 어느 겨울밤이었습니다. 집에서 공부를 하던 저는 문득 ‘지금 제단에서는 한창 예배를 드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날이 토요일이라 원효로 구제단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철야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불현듯이 거기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공부하던 책을 덮어 두고 제단으로 달려간 저는 우선 창문을 통해 예배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예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서 자리가 전혀 없는 데다가 예배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전등 빛이 환하게 비치는 창문 옆에 서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꼭 하나같이 박자를 맞춰 손뼉을 치면서 힘차게 찬송을 부를 때, 그 우렁찬 소리에 제 마음까지 벅차 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활짝 핀 사람들의 얼굴이 어찌나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지 그 모습들을 보고만 있어도 그렇게 흐뭇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드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등을 탁 하고 쳤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니 제복 차림의 남자 분이 저를 보고는 “여기서 불이 났다는데 어디서 불이 났는 줄 아니?”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불 안 났는데요. 예배 보는 사람들만 있구요, 불은 안 났어요.” “아니야. 여기에 불났다는 연락을 받았다니까.” “아니에요. 제가 여기 온 지 30분이 넘었는데 불 안 났어요.” 제가 계속해서 불이 안 났다고 하자 아저씨는 본인이 용산소방서의 소방관이라면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젯밤 제단에 불성신이 내렸대요
그런데 불이 난 줄 알고
소방관이 왔다 갔다는 거예요`

그 당시는 소방서에 높은 ‘소방망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서 소방관들이 24시간 보초를 서며 어디에서 화재가 나는지 감시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용산소방서의 소방망루에서 근무하던 소방관이 원효로 3가에 있는 전도관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용산소방서에서 급히 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산소방서에서 여기까지 가까운 거리여서 소방망루에서 내려다보는 소방관이 잘못 볼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한참 동안 제단 주위를 돌면서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또다시 저에게 와서 정말 불이 안 났냐고 묻기에 진짜로 불이 안 났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되돌아서 갔습니다.

그다음 날 저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실 안에는 밤새도록 철야한 사람들이 이미 가득 차 있어서 들어갈 틈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단 옆의 미나리꽝 주변과 한강 샛강 쪽의 둑에까지 북적대며 모여 있었습니다. 제단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저는 스피커와 가까운 자리를 잡지 못해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박 장로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장로님께서 그러시는데 어젯밤에 제단에 불성신이 내렸대요. 그런데 불이 난 줄 알고 소방관이 왔다 갔다는 거예요.” “제단에 불기둥이 확 내려오니까, 불이 나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른 줄 알았나 봐요.” 하며 서로들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어제 소방관 아저씨가 보았다는 불이 바로 불성신이구나!’ 하면서, 제단에 ‘불성신’이 내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인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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