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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그날의 무더기 심방

발행일 발행호수 2244

김영정 퇴임관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956년 원효로제단에서 집까지 거리가 멀어서 새벽예배를 드리기 힘든 사람들은 자신의 동네에 기도처를 마련했습니다. 그런 곳이 하나 둘씩 생겨났고 기도처를 중심으로 구역이 생겨났습니다. 종로구, 성동구, 동대문구 등으로 묶이고 나중에는 갑구와 을구로 또 나뉘어졌습니다.

제가 성동 갑구 구역장을 맡았을 때입니다. 하루는 꿈에 하나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축복을 해주시고 저도 안찰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갔더니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 구역으로 심방을 오신다고 했습니다. 점심 식사 대접을 저희 집에서 하기로 하고 아침부터 장을 보고 음식 준비를 했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온 전도사님들까지 20여 분이 저희 집에서 식사를 하셨는데 목사도 한분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왜정 때 지은 아파트였는데 슬쩍 밀어 벌어진 후스마(종이 미닫이문) 틈 새로 다른 교인들과 함께 그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식사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등을 기대시고 과일을 깎아 드시면서 앞에 앉은 목사님에게 “목사님이 속으로 나를 욕하는 걸 말할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겁을 하는 목사님에게 “마음 속으로 나 욕하셨지요. ‘영모님이라고 하면서 과일을 깎아 혼자 먹는다’고 욕했지요?”하시고는 “내가 보여줄께, 눈 감고 있으라우.”하신 후에 “본 대로 말하시오.”하시니까 앞에 앉아있던 목사님이 자세를 고쳐 앉더니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목사가 이북에 있을 때 술집에서 기생을 끼고 술 먹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안을 들여다 보던 저희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심방을 나오시면 그 구의 교인 집을 한 곳도 빠짐없이 심방을 하셨습니다. 저희 구역은 언덕배기에 집들이 많았고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은 집도 많았습니다. 구역장인 저는 하나님 다음 심방하실 집에 먼저 들어가 방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린 속옷 빨래를 걷기도 하며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시기도 하고, 또는 방에 직접 들어가셔서 기도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루는 이제현 집사라는 분의 집에 심방을 갔는데 추운 겨울에 방 식지 말라고 아이들이 오줌을 싸 지린내가 나는 포대기를 방에 깔아 놓고 집사님은 공장에 나가고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집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포대기 속에 손을 넣어 소리 없이 기도하시고는 포대기 속에다 준비해 오신 금일봉을 넣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들어와 그 돈을 써버릴까봐 저는 그 돈을 선반에 올려놓고 나와 심방을 다 마치고 그 집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저녁에 귀가한 집사님은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울고 저는 그 은혜에 감격해 울고 둘이 그렇게 울었습니다. 한 두 군데가 아니라 가시는 곳곳마다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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