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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세계사 <11> 순교(殉敎)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인가? 죽음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인가?

다시 쓰는세계사 <11>
발행일 발행호수 2587

1612년 10월 8일,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국왕<자료1>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자료1> 네덜란드 국왕 마우리츠 판 나사우(1567년~1625년).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의 80년 전쟁(1567년~1648년)을 진두지휘하며 가톨릭 광신분자들이 일으키는 테러와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그는 무역과 통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일본에게 가톨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출처:위키피디아)

“가톨릭 신부들은 일본인을 가톨릭으로 끌어들인 후 종교를 빌미로 큰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톨릭의 생각대로 되는 것입니다.”(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당시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 거래를 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80년 전쟁을 치른 것을 비롯해 가톨릭 광신분자들이 일으키는 테러와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는데, 가톨릭이 전쟁을 부추길 것이라고 일본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그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이전 통치자인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 보호 정책을 펼쳐 선교사를 후대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도는 나날이 증가해 60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즈음 일본 인구가 2500만 명으로 추산되니 인구의 2.4%가 가톨릭 신도였다는 것인데, 2017년 기준으로 가톨릭 신도가 인구의 0.3%에 그치는 것을 보면 당시는 일본의 가톨릭 전성시대라 할 수 있었다.

<자료2> 가톨릭 신도를 목격할 경우 신고하라는 내용의 표지판. 가톨릭 금지령 이후 일본은 가톨릭 신도를 색출하기 위해 마을 곳곳에 표지판을 걸어 가톨릭 신도를 당국에 신고하도록 했다. 일본은 1612년 이후 250년 동안 가톨릭 금지 정책을 펼쳤고 이는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가톨릭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는 사실을 뿌리 깊이 각인시켰다. (출처:https://4travel.jp/)

일본의 통치자 자리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선봉으로 가톨릭 선교사를 보내 전쟁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속으로 우려했으나, 신중하게 인내하며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 그때 가톨릭의 위험성을 경고한 네덜란드 국왕의 편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편지를 받은 지 두 달 후인 1612년 12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격적으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을 발표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 だいみょう)라 불리던 가톨릭 영주들이 선교사를 비롯해 가톨릭 세력을 비호하고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가톨릭 유력자 148명까지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250년간 가톨릭 금지 정책을 펼쳤고 이를 통해 가톨릭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라는 사실이 일본인의 의식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었다.

<자료3> 가톨릭 신도를 신고하라는 표지판을 보는 일본인들. (출처: http://kirishitan.jp/histories/his001)

가톨릭 금지 정책을 시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의 어떤 면을 가장 우려했을까. 그의 명령으로 반포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 내용 중에 가톨릭의 핵심을 찌른 문장이 있다.

<자료4>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반포된 가톨릭 선교사 추방문. 이 추방문에는 가톨릭의 핵심을 찌른 문장이 있다. “가톨릭 선교사는 모든 정책과 법령을 위반하고 정법(불교)을 비방하며 의(義)가 없고 선(善)을 파괴한다. 형인(刑人, 순교자)을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배례한다. 순교를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사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출처: https://ameblo.jp/u-saekikensetu/entry-12026057953.html)

“가톨릭 선교사는 모든 정책과 법령을 위반하고 정법(불교)을 비방하며 의(義)가 없고 선(善)을 파괴한다. 형인(刑人, 순교자)을 보면 기뻐하며 달려가 배례한다. 순교를 종교의 본질이라 여기는데, 사법(邪法=사교)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자료2,3,4>

다시 말해 올바른 정신이라면 참혹한 죽음을 보고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마땅할 텐데, 죽음을 보고 기뻐하며 숭배하는 모습에서 사람의 정신을 기만하는 가톨릭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이 사악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 같은 도쿠가와 시대의 정책은 『하데우스(破提宇子, 가톨릭의 신을 파괴하다.)』라는 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책의 저자인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은 가톨릭과 순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준다.<자료5,6>

<자료5> 『하데우스(破提宇子, 1620년)』 책 표지. 『하데우스』라는 제목은 가톨릭의 신을 파괴한다는 뜻으로, 가톨릭의 폐해에 대하여 통렬하게 지적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톨릭 금지 정책의 기본이 되었고, 메이지 시대를 지나 현재까지 잠재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출처:리쓰메이칸대학 The Early Japanese Book Portal Database)

<자료6> 『하데우스』의 저자인 후칸사이 하비안(1565년~1621년). 에도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하비안은 유교와 불교, 가톨릭에 걸친 탁월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이 침략의 도구이자 난세의 원인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일본인은 가톨릭의 사악함을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https://japaneseclass.jp/)

“순교는 가톨릭을 위해 몸과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니 무서운 일이다. 가톨릭은 군대를 파견해 다른 나라의 탈취를 도모하는데, 천 년 후에도 가톨릭이 일본을 탈취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 골수에 가톨릭의 사악함을 새겨야 한다.”
통치자 입장에서 가톨릭이 군대를 앞세워 일본을 탈취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인이 가톨릭에 세뇌되어 영혼을 기만당하고 생명을 먼지처럼 버리는 것이었다. 보통 일본인은 ‘할복’으로 죽음을 명예롭게 여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할복은 무사 계급에 한정된 것이었고 또 할복이 명예를 담보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죽음에 이르는 형벌’이었지 순교와 같이 ‘죽음을 숭배하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료7> 1637년 시마바라의 난 당시 가톨릭 신도들을 진압하는 정부군. 가톨릭 신도들이 일으킨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가톨릭의 위험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후 숨어 있는 가톨릭 신도들을 색출하며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을 금지했다. (출처 : https://4travel.jp/)

순교의 실체를 꿰뚫어 본 하비안은 ‘가톨릭의 사악함을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가톨릭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자료7>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들이 결집한 성으로 들어간 정부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군이 들이닥치자 가톨릭 신도들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얼굴로 죽음의 순간, 즉 순교라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교는 집단 자살과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타인이 끊게 만든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죽음을 찬미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이후 숨어 있는 가톨릭 신도들을 색출하며 더욱 철저하게 가톨릭을 금지했다.

순교(殉敎)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순교라고 하면 ‘죽음까지 불사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죽음 그 자체’를 신앙이라 여기며 숭배한다. 순교의 한자를 보면 ‘따라 죽는 것(殉)을 가르친다(敎).’는 뜻으로 가톨릭의 본질을 나타내는데, 가톨릭에서 말하는 순교란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며 “죽음을 강제하는 사고방식(종교학대사전)”이기 때문이다.

<자료8> 순교 성인으로 추앙받는 드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그림. 250년경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였던 드니(Denis)는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고, 가톨릭은 순교 성인으로 드니를 추앙하고 있다. 그가 목이 잘린 장소인 몽스 마르티스(Mons Martis, ‘순교자 언덕’)는 후일 몽마르트르(Montmartre)로 불리게 된다. 순교 전설에 의하면 드니는 천사들에게 권능을 부여 받아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적을 선보였으며, 위 그림은 이를 표현한 것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순교를 의미하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은 ‘증거’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마르티리온’
(μάρτυριον)에서 왔다. 이에 의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고결한 ‘증거’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은 끊임없이 순교자를 ‘성인(聖人)’으로 기념하고 추앙하고 있다.<자료8> 이처럼 죽음을 신앙의 증거로 숭배하고 찬미하는 사고 방식은 가톨릭의 발생 시점, 즉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가형은 예수 출생 전 로마 시대부터 집행된 사형 방식으로 이보다 더 혐오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당하고 새들이 날아와 맨살을 쪼아 먹기도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가는 시체를 직접 보고 그 악취를 맡아 본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고,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역겨워했다.<자료9>

<자료9>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은 예수의 모습.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형보다 더 혐오스럽고 경멸을 받는 처형은 없었다. 알몸인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당했으며 어떤 죄수는 거꾸로 매달리거나 성기를 꼬챙이에 꿰기도 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썩어 가는 시체에서 악취를 맡아 본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에 관련된 모든 것을 혐오스러워했고, 십자가라는 말 자체를 역겨워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십자가형을 받은 자들은 가장 극악한 범죄자의 본보기였으며 예수 또한 같은 이유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불쾌하고 혐오스러우며 기괴한 일이었다. 특히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는 가장 높은 신(야훼)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십자가형을 받아 피 흘리며 죽어 갔다는 것은 극도로 경악스러운 이야기였고, 신성모독을 넘어 발광 중의 발광이었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가톨릭 신도조차 예수가 죽은 과정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끔찍하고 비참한 장면을 아무도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313년 가톨릭이 공인되고 십자가형이 폐지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톨릭은 ‘예수와 야훼가 하나의 본체’라는 선언(325년 니케아 공의회)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폐지로 그 광경을 실제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가톨릭은 십자가형을 ‘혐오스러운 사형 방식’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 방식’으로 위장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의식을 혼동시키는 계략과 술수가 집요하고 은밀하게 계속되면서 신도들은 십자가형에서 잔인한 공포를 느끼고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형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계략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순교 전설’이었다.
가톨릭 교황 젤라시오 1세(Gelasio I, 492~496 재위)는 미사 중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는데, 순교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인(聖人) 전설’이 미사 중에 낭독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口傳)됐으며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시각적으로 묘사되었다. 또 가톨릭교회는 순교자를 기리는 축제를 열어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축제를 시작했다.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순교 이야기는 신도들에게 ‘사이코드라마’처럼 작용해 신도들이 예수나 순교자들이 겪었던 죽음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동참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숭배와 갈망으로 이어졌다.
“나는 나를 죽여 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는 은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천한 장소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독일의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리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년~1824년)의 이야기를 보면 십자가형을 곧 은총으로 여기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썩어 가는 시체가 매달린 혐오스러운 형틀이 구원과 은총의 상징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역사 저술가인 톰 홀랜드는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세상을 바꾸어 놓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교주로 내세운 초기 가톨릭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를 드러냈을 때, 이를 본 로마의 사법당국은 가톨릭 신자들이 괴상하고 변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골의 장소’라는 뜻을 지닌 골고다 언덕에서 이름 없는 범죄자의 처형을 바탕으로 발흥한 종교는 지난 2,000년 동안 스스로 ‘보편적(catholic)’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자신들의 신앙이 보편적이라는 광적인 신념 덕분에 미지의 바다를 건너 대륙을 탐험할 수 있었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그 대륙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제하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생명까지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었다.
톰 홀랜드에 의하면 이 세상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죽음을 정복하고 구원의 은총을 내려 줬다고 신봉하는 이 세상은 아직도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이 세상이 다시 뒤집혀 진리를 올바로 바라보게 된다면 이전의 지배자는 능수능란한 기만술로 여전히 보편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위장술이 벗겨지고 썩어 가는 악취를 풍기며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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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쟁이란?

80년 전쟁 중 스페인이 자행한 네덜란드인 학살을 기록한 그림.(출처: 네덜란드 암스트레담 국립 박물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지배하에 있었던 네덜란드 지역의 17개 주가 1567년~1648년 스페인에 대항해 벌인 독립 전쟁을 말한다.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했으며 신교의 등장 이후에는 칼뱅파의 신교도가 급증했다.
1556년 스페인의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가 가톨릭의 수호자임을 내세우며 네덜란드 지방의 신교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나섰으며 1567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으로 처단했다. 이 같은 가톨릭의 탄압에 항거하는 네덜란드 지방의 저항 운동은 독립전쟁 양상으로 발전했고 80년간의 전쟁 끝에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80년 전쟁 중 스페인이 자행한 네덜란드인 학살을 기록한 그림.(출처: 네덜란드 암스트레담 국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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