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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세계사 <6> 세계에 전파된 악의 기원… 수은 중독과 매독, 탐욕이 부른 질병에 대하여

다시쓰는 세계사 <6>
발행일 발행호수 2581

가톨릭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빈자의 날”을 제정해 해마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때마다 노숙자와 실업자를 베드로 성당에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교황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었다. 작년 11월 빈자의 날에 교황은 베드로 성당 미사에서 “소수의 탐욕으로 다수가 빈곤해진다.”며 탐욕의 세력 때문에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강조했다.<자료1>

<자료1> 2019.11.17. ‘빈자의 날’에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서 미사를 하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모습. 이날 미사에서 프란치스코는 “소수의 탐욕으로 다수가 빈곤해진다.”고 강조했다. (사진 출처 : 바티칸)

탐욕이 수많은 사람을 빈곤에 빠뜨리는 일은 역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스페인에게 300년간 착취당한 잉카 사람들이 대표적인데, 스페인이 마치 흡혈귀처럼 잉카의 자원을 빨아들여 잉카는 돌이킬 수 없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시 스페인이 잉카를 지배하도록 허가해 준 사람이 교황 알렉산드르 6세였다. 스페인이 잉카에서 마음껏 탐욕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교황의 허가 덕분이었다.

스페인의 탐욕은 잉카를 빈곤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수은 중독이라는 불치병까지 안겨 주었다. 수많은 잉카 사람들이 광산에 끌려가 착취를 당하다 수은 중독으로 죽어 갔지만 탐욕에 눈이 먼 스페인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같은 시기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유럽 사람들은 매독을 퍼뜨리는 슈퍼 전파자가 되었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끝없는 탐욕이 어떻게 질병을 불러왔는지, 그 질병의 전파 경로를 따라가 본다.

15세기 당시 잉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1493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스페인에게 아메리카를 지배하라고 허가해 줄 때(토르데시야스 조약) 교황도 스페인도 잉카라는 나라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슨 땅이든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대리자인 교황은 온 세상을 마음대로 나눠 줄 수 있고, 교황에 복종하지 않으면 누구든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통고문 “레케리미엔토”)

잉카 사람들은 다 함께 농사 지으며 식량을 배분했기 때문에 강제 노동을 알지 못했고, 잉여 농산물을 어려운 사람에게 먼저 주었기 때문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점령한 뒤부터 잉카는 노동 착취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 원주민을 노예이자 동물로 취급했다. 잉카 원주민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하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잉카 사람들은 라마(낙타과에 속하는 포유류)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기 때문에 하역용 가축으로 이용당했고, 노새보다 더 오랫동안 광산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광산에서 착취당했다.

아메리카 포토시(Potosi, 현재의 볼리비아)에는 순도 높은 은이 풍부하게 매장된 은광이 있었다. 스페인 지배자들은 은광에 세로 리코(Cerro Rico, 부유한 산)라는 이름을 붙이고 원주민 노예를 끌고 와서 은을 캐내기 시작했는데, 손으로 광물을 캐낸 후 그것을 등에 지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자료2> 노예들은 광산으로 기어 들어갔다가 일주일도 못 되어 머리나 다리가 부서져서 밖으로 끌려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다.(E.갈레아노, 『수탈된 대지』, 범우사, 2016, 104p.)

<자료2> 포토시 광산의 모습. 아메리카 원주민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는 맨몸으로 깊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갱에 들어가 작업했고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노예들은 광산으로 기어 들어갔다가 일주일도 못 되어 머리나 다리가 부서져서 밖으로 끌려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진 출처 : http://spaziopress.blogspot.com/2016/11/wonderland-potosi.html)

4만 톤이 넘는 은을 캐내는 동안 800만 명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장 지글러, 『빼앗긴 대지의 꿈』, 갈라파고스, 2018, 202p) 설상가상으로 은을 분리하는 데 수은을 사용하면서 이 죽음의 행렬은 수은 광산에까지 번지게 되었다.

광산에서 캐낸 은은 다른 광물과 섞여 있었기 때문에 분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은과 잘 뭉치는 수은을 이용해 분리하면서 수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수은을 생산했던 우앙카벨리카(현재의 페루)에도 원주민 노예들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수은 광산에 가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그곳을 ‘공립 도살장’이라 불렀고, 어머니들은 자식이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구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토록 극단적인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수은 중독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있었다. 수은 중독에 걸린 사람은 정신이 혼란해지고 몸이 점점 쇠약해지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노예들은 수은이 섞인 독한 공기를 마셨는데, 수은은 쉽게 기화하기 때문에 공기에 섞여 폐에 들어가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수은 중독에 걸리면 우울증과 기억 상실이 찾아왔고 치아가 빠지며 말의 높낮이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가장 흔한 증상은 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떨리는 몸을 질질 끌면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동료들의 무덤 옆에 영원히 잠들었다.

얼마나 많은 원주민이 수은 중독으로 고통 받고 죽어 갔는지는 기록은 소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캐낸 은의 양이 당시 전 세계 생산량의 85%를 차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숀 윌리엄 밀러, 『오래된 신세계』, 너머북스, 2013, 167p) 볼리비아의 한 작가가 “스페인이 가져간 은을 합치면 대서양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할 만큼 스페인이 유출해 간 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만큼 탐욕으로 인해 고통받은 원주민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아메리카에서 강탈해 간 은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으로도 흘러 들어갔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을 화려하게 재건축하기 위해 독일의 전설적인 고리대금업자 야코프 푸거에게 자금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푸거의 손에 아메리카 은이 들어갔다. 스페인은 교황이 허가해 준 덕분에 아메리카에서 부를 거머쥘 수 있었고 교황은 스페인 덕분에 빚을 갚게 되었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은 엄청난 부를 획득한 것에 대해 가톨릭의 하느님과 예수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수많은 성당을 지었다. 은광이 위치했던 포토시에만 86개의 성당이 세워져 십자가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은을 캐내다 스러져간 수많은 노예들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원주민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이교(異敎)를 숭배한 그들의 죄가 예수를 진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 / 출처: 장 클로드 카리에르, 『바야돌리드의 논쟁』)

“상당히 많은 원주민의 생명을 광산이 빼앗아 간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광산에서 했던 강제 노동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종한 생활 때문에 죽은 것이다.”(알론소 카리오 데 라 판데라, 스페인의 관리)

광산에서 일하다 죽어 간 원주민 노예들은 예수를 진노하게 만든 죄 때문에 죽었을까. 아니면 방종한 생활 때문에 죽었을까. 그들의 시신은 수은 중독으로 하얗게 변한 뼈가 썩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서 착취한 자들을 고발하는 법의학적 증거가 되고 있다.

끝없는 물질적 탐욕이 수은 중독을 불러 왔다면 매독은 방탕한 육체적 탐욕이 불러온 질병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에서 수은 중독을 전파시키며 원주민을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고 있을 때, 비슷한 시기 유럽 사람들은 끔찍한 매독의 슈퍼 전파자가 되었다.

매독의 전파로 유명한 사건은 1495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있었다.<자료3> 당시 프랑스 황제 샤를 8세는 5만 명의 용병으로 나폴리를 포위했다.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에서 모여든 대군에는 800명의 매춘부가 딸려 있었다. 나폴리가 함락되고 나자 이들은 방탕한 생활에 몰두했고 전투가 끝난 후 용병과 매춘부는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자료3> 1495.2.22. 프랑스 황제 샤를 8세의 군대가 이탈리아 나폴리를 함락시킨 모습. 5만 명에 이르는 대군의 깃발에는 라틴어로 ‘Voluntas Dei; missus a Deo’ “신의 의지; 신이 보낸”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군대는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에서 모여든 용병으로 이루어졌고, 800명의 매춘부가 딸려 있었다. 나폴리가 함락되고 나자 이들은 방탕한 생활에 몰두했고 용병과 매춘부가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매독 또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사진 출처 : World History Archive / Alamy 그림 제목 : “Entry of Charles VIII into Naples” by Eloi Firmin Feron, 19th century. 내용 출처 : http://egloos.zum.com/kk1234ang/v/2883227,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사 이언스북스, 2001)

불과 몇 개월 후 매독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급속히 번져 나갔고 5년 후에는 덴마크, 스웨덴, 영국, 그리스, 폴란드, 러시아까지 전파되었다.

성 매개 질병이라 불리는 매독은 전신에 고름 덩어리를 만들었으며 심한 경우 궤양이 뼈를 파고 들어가 코와 입술 등이 녹아 내렸다. 성행위를 매개로 전염된다는 사실과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증상 때문에 사람들은 매독을 죄악의 징표라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병”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병”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병” 터키에서는 “가톨릭병”이라 부르며 서로 상대방에게서 옮았다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했다.(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사 이언스북스, 2001,190p)

그렇다면 매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매독의 기원을 둘러싸고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 옮아 왔다고 생각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부터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을 성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탐험가들이 원주민 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492년 이전에 매독에 감염된 유골이 영국에서 발견되면서 매독이 유럽에도 존재했으며 다른 감염병과 혼돈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자료4>

<자료4> 매독의 흔적이 있는 유골을 조사하는 학자 돈 워커. 2010. 10. 24. 영국 더 타임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영국 이스트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는 1200~1400년 사이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 7구가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유골 가운데 10살 남짓한 아이의 두개골 이마 부분에서 매독의 흔적으로 보이는 흉터를 발견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매독에 전염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런던 박물관 골학자인 브라이언 코넬은 이 유골들과 함께 묻힌 동전을 이용해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해본 결과 유골들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전에 땅에 묻혔을 확률이 95%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 더 타임즈)

여러 주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15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매독이 ‘악성 매독’이라 불릴 만큼 독성이 강했으며 빠른 시간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와 아프리카에도 매독과 비슷한 전염병이 존재했지만 유럽만큼 강력하지 않았고 급속도로 전파되지도 않았다. 유럽이 매독의 1번 확진자는 아니라도 슈퍼 전파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매독으로 코가 녹아내린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매독 환자들은 코의 피부가 점점 괴사하면서 코 밑의 연골이나 뼈 조직까지 약해져 코가 내려앉게 되었고 심하면 코뼈가 얼굴에 파고들어 살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환자들을 위해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외과 교수였던 가스파레 탈리아코치는 코 재건술을 시도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재건술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인간의 외모를 고치는 것은 창조자 즉 가톨릭의 하느님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가톨릭 성직자들은 매독에 걸려도 코 재건 수술을 받지 않았다.

당시 성직자들은 첩을 거느리고 살았기 때문에 매독이 창궐하는 환경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축첩세만 내면 아무 불편 없이 첩을 데리고 살 수 있었고, 신도들 앞에서는 독신 생활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연기할 수 있었지만 매독에 걸려 코가 녹아 버리자 더 이상 거룩한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매독으로 코가 찌그러진 추기경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유행해서 민중들은 “그 코는 현자(賢者)의 코. 다음에는 그 코가 교황에게 내려지겠지.”(Eduard Fuchs, 「Illustrierte Sittengeschichte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하고 노래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알렉산드르 6세도 모두 매독에 걸린 것으로 유명했다. 율리우스 2세를 보좌했던 의전관 그라시스의 보고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일이 되었을 때 교황은 매독에 걸려 발이 엉망인 상태였다. 예수의 수난일에는 관례로 신도들이 교황의 발에 입을 맞췄는데 그때 교황은 누구에게도 발 키스를 허락하지 않았다.<자료5>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자신의 친딸인 루크레치아를 첩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알렉산드르 6세가 매독에 걸리자 불과 2개월 만에 가족과 첩들까지 17명에게 매독이 전염되었다.

<자료5> 가톨릭의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0.31. ~ 1513.2.21.)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교황으로 1506년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지시하고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제작을 지시하는 등 예술 애호가로 유명하다. 한편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부터 사생아를 두고 딸과의 근친상간 등의 사실도 알려져 있다. 율리우스 2세를 보좌했던 시의(侍醫)는 “교황의 온몸은 소름끼치는 음탕의 증거로 뒤덮여 있었다.”고 보고했으며, 교황의 의전관 그라시스에 따르면 율리우스 2세는 매독으로 인해 발의 피부가 발진과 농포로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 내용 출처 : 위키백과, 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까치, 2015, 320p)

16세기 매독이 퍼지던 무렵 독일의 민중들은 “교황 성하”를 “음란 성하”라 부르고, “추기경”을 “수캐”라 불렀는데 이 비유는 가톨릭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 시대를 연구한 독일의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이렇게 적었다.<자료6>

<자료6> 에두아르트 푹스(1870~1940) 독일의 풍속사 연구가, 문명사가, 미술수집가.

“당시 유럽에서 교황과 가톨릭 교회는 모든 가톨릭 신도 위에 군림한 최고 권력자였고, 이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파괴적인 독기를 내뿜었다. 성직자들의 퇴폐적 음란 풍조는 유럽 시민들의 풍기 문란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전염병은 적절한 숙주를 만났을 때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숙주는 생물학적인 조건이지만 그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신적인 요소도 맞아야 한다. 육체적 탐욕을 좇았던 가톨릭의 풍토와 정신은 악성 매독균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는 이상적인 숙주였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팬데믹 공포에 빠져 있는 지금, 어떤 정신적 요소가 숙주를 만들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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