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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40>부활이라는 믿음에 대하여-②

세계 종교 탐구 <40>
발행일 발행호수 2639

▣ 부활을 역사적 사실이라 믿다

예수 부활의 진위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근거로 예수의 부활을 지지한다. 성경 속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주장, 죽은 예수가 제자들과 바울 앞에 나타났다는 주장. 예수 스스로 본인이 부활했다고 얘기하는 구절 등을 증거로 내세우며, 성경 안에는 부활에 대한 증언이 가득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서학자 바트 어만은 성경의 증언들이 역사적 가치를 가지기에는 부활 당시의 자료도 아니고, 공평무사하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신약성경은 목격자들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예수 사후 35~65년이 지나서 쓰였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선전 목적으로 변경된 이야기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복음서 사이의 진술들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먼저 나온 복음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다음 복음서를 쓴 정황도 관찰된다.

부활은 성경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외경을 제치고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채택한 정경들 사이의 증언조차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의 처형 장면, 예수의 사망 일시, 예수 무덤에서 목격된 상황, 목격자, 목격자 수 등 주요 장면의 굵직한 묘사들이 복음서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또 어만이 지적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부활을 일으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또한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활도 기꺼이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대 여러 기적을 일으키고 부활했다고 알려진 다른 종교 지도자와 신들의 사례는 성경에서 소개하지 않거나 악마 또는 예수를 방해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공평하지 않고 편향적인 진술은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역사적 저술이라기보단 신학적 저술로 평가된다.

어만은 “역사 연구 규범은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증거를 보면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요구한다”고 했다. 성경은 어떤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자료1> 2000년 7월 29일자 뉴욕타임즈 B9면
2000년 7월 29일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즈 B9면과 B11면에는 ‘역사로서의 성서, 새로운 고고학적 시험에서 낙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공인됐던 성서 기록이 허구로 밝혀졌다는 고고학계 주장을 담은 기사다.
(출처: 뉴욕타임즈 타임머신)

근대 들어 이성과 합리주의가 신을 부정하며 성경의 진위 여부가 도마에 오르자, 성경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으려는 ‘성서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는 성서 기록을 실증하겠다는 목적 아래 발굴품을 예단(豫斷)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 횡행했고, 모든 발굴 성과를 성서 내용으로 수렴시키며 성서고고학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예단 없는 고고학 탐사를 목표로 한 2세대 고고학자들이 등장하고부터는 성서의 기록을 부정하는 증거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2000년 7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즈에는 ‘역사로서의 성서, 새로운 고고학적 시험에서 낙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자료1> 기사의 내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공인됐던 성서 기록이 허구로 밝혀졌다는 고고학계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성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던 성서고고학이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성묘교회 또는 거룩한 무덤 성당이라 불리는 기독교 성당이 있는데, 예수가 묻힌 무덤이자 부활한 장소로 전해져, 4세기부터 기독교 성지 순례의 중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실제 예수의 무덤이 맞는지는 공식적으로 진위 여부를 모른다고 하며, 이 성당이 있음에도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서 예수가 묻혔던 돌무덤이라 주장하는 곳이 또 발견됐는데, 그 증거는 성경의 묘사와 닮았다는 것이었다.

<자료2> 유물통에 보관된 예수의 피를 묻혔다는 천
전설에 따르면 예수의 피를 묻혔다는 천이 담긴 이 유물은 1147~ 1149년 제2차 십자군 전쟁 중 알자스의 티에리가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조사에 따르면 유물을 담은 병은 수정(rock crystal)으로 만들어졌으며 11세기 또는 12세기 콘스탄티노플 지역에서 만들어진 비잔틴 향수병으로 밝혀졌다. 한편, 유물의 진위 여부에 대한 증거는 없다. (출처: 위키피디아)

가톨릭에서는 성경 속 유적뿐만 아니라 유물들도 실존한다고 믿는데, 부활에 관련된 유물들로는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는 수의, 예수의 피를 묻힌 천, 예수를 찔렀다는 창, 예수가 매달렸다던 십자가의 나뭇조각 등이 있다.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는 천으로 유명한 토리노 수의는 1350년 갑자기 발견되었는데, 제작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예수가 죽었다는 30년이 아닌 1260∼139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정되었다. 예수의 피를 묻혔다는 천은 유리 원통에 담긴 채 12세기에 발견되었는데, 그 통도 예수가 죽었다는 1세기가 아니라 발견 주장 시기인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유물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자료2> 또 성경의 진술대로라면 ‘한 명’의 병사가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찌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예수를 찔렀다는 창은 튀르키예의 안디옥에서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고, 바티칸 베드로 성당,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박물관, 아르메니아 바가르샤팟의 박물관 등에서도 서로 성경 속의 창이라며 전시하고 있다. 이 창들은 모두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으며 형태도 다르다. 가톨릭에선 3개 모두 성창 유물로 인정하고 있지만, 어느 것도 진위 여부는 밝히지 않는다.<참고자료1>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나뭇조각이라 주장하는 것들은 너무 많아, 그것들을 다 모으면 배 한 척을 지을 수 있겠다는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부분 진위가 확인되지 않거나 가짜로 판명됐음에도 이 유물들을 직접 보기 위해 방문하는 가톨릭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토리노 수의의 진위 논란에 대해서는 종교의 수장인 현 교황 프란치스코까지 나서서 “진위 여부 보다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해명하는 등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필사적으로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료3>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제우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대적 추종자를 끌어모으면서 초자연적 존재로 숭배받던 신이다. 하지만 더 이상 숭배받지 않는 현대의 제우스는 신화 속 허구의 존재로 전락했다. 반대로 허구의 존재라도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다면 능력이 있다고 믿어지는 신이 될 수 있다. 종교들은 자신의 신들이 계속 숭배받을 수 있도록 열렬한 추종자들로 하여금 신을 숭배하는 퍼포먼스를 과시하게 한다. 어떤 신에게 공개 기도를 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을 거행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이 따르는 행위를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면, 사람들은 그 신이 정말 숭배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아라 노렌자얀에 따르면 숭배받지 못하는 신은 신화적, 허구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기에는 대대적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면서 초자연적 존재로 숭배를 받다가 다른 장소 다른 시기에 가서는 단순히 신화나 허구적 이야기 속의 존재로 전락하는가?’ 하는 일명 ‘제우스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자료3> 이와 비슷하게 ‘산타클로스 문제’도 있다. 어린이에게 있어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는 도덕적 심판을 하는, 자신을 어디서든 감시하는 막강한 신적 존재다. 하지만 이성이 발달한 성인이 돼서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없다. 제우스처럼 신자들이 다른 종교로 개종 당해 신자를 잃었거나, 산타클로스처럼 이성적 판단으로서 거짓이 증명된 신들은 더 이상 숭배받지 못하고, 상상과 이야기 속의 인물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종교들은 열렬한 추종자들이 독실하게 자신들의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회적 증거를 만들어, 자신들의 종교로 사람들이 개종하게 만든다. 그 증거란 특정한 신적 존재에 대한 진정한 헌신을 증명해주는 행동, 이를테면 고통스럽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 행동에 대한 제약, 시간과 노력과 부의 희생 등을 말한다. 특정 신에 공개적 기도,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 고통스러운 희생이 따르는 행위 등을 과시하는 행동을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면 그 신에 대한 헌신이 쇠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부활을 믿는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집단인 기독교에서는 해마다 부활절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지난 3월 31일에도 세계 각국에선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축제와 퍼레이드가 이어졌다.<자료4> 그런데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절기 중 하나지만, 둘을 대하는 다른 종교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성탄절에는 불교 사찰에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게시되는 등 다른 종교들의 축하 메시지가 발표되는 것과 달리 부활절에는 다른 종교에서 축하하는 경우가 없다. 신자가 아니고서는 부활까지 인정해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인과 다른 종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사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그 종교의 굳건한 신앙심의 증거일까?

<자료4> 2024년 3월 31일, 세계 각지의 부활절 행사 모습
기독교에서는 해마다 부활절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 지난 3월 31일에도 세계 각국에선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축제와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출처: AP)

▣ 믿음에 대하여

기독교는 믿음을 중시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인 바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얘기했다. 믿음이 실상이자 증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적 믿음의 특징을 잘 요약하여 보여준다.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기독교는 인간과 신을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간주한다. 인간은 신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인간 이성의 힘으로 다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인식의 한계 너머의 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게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 참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에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 나올 정도로 이성적 인식과 초이성적 믿음이 대립을 이루게 된다.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기독교는 성경과 예수를 통한 ‘계시’를 주장한다. 성경을 인간의 이성적 사유의 결과가 아닌 신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타락, 예수의 출생과 기적 및 부활에 대해 인간 이성의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조건 없이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기독교의 믿음은 ‘승인으로서의 믿음’으로도 분류되는데, 남의 말을 참말이라 혹은 정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사상이 발전하면서 진리를 사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고, 성경에서 실제적인 사실이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것들을 사실이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결국 ‘믿음’이란 이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 사실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정말로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흔히 듣는 대로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다. 이런 종류의 믿음이란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 순리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 이른바 ‘지성의 희생이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하고, 이런 종류의 믿음이 없는 상태를 ‘의심’이나 ‘불신’으로 취급하고, 그것은 그대로 죄라고 여긴다.”

믿는다는 말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모르기 때문에 의심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믿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마주했을 때, 의심하거나 믿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믿음의 종류가 갈린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믿음은 증거를 생각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회피하는 큰 변명이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이때 그가 비판한 것은 비이성적이며 맹목적인 믿음이다. 이에 반해 ‘이성적 믿음’이란 무비판적 맹신이 아니라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확신을 얘기한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도 없기에, 믿음이 불가피하다면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이성적 믿음이 더욱 바람직한 믿음의 방향일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모든 종교의
주된 악덕”이라며 “증거로부터의 독립은 옥상에서 외치는 자부심이자 기쁨”일 뿐이라고 얘기했다. 나아가 그는 “증거가 없는 것을 넘어 심지어 반대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 한다”며 비이성적인 믿음을 비판했다.

지난달 3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절을 맞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세계 도처에 있는 ‘전쟁의 돌들’을 굴려 없애 버리자”고 전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셨던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인간성을 전쟁과 불의 안에 가두는 돌을 굴려 없앨 권능을 갖고 계시다”며 교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으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듯 믿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전쟁을 막아달라는 기도는 작년부터 했었다. 작년 부활절,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모든 전쟁을 끝내주소서”라며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도 기존 전쟁은 종식되지 않았고, 오히려 21세기 최악의 유혈 전쟁으로 불리는 새로운 전쟁이 추가적으로 발발하는 현실을 맞았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공개적 기도를 멈추지 않고 대대적인 기념의식을 지속하는 것은 예수를 제우스로 만들지 않기 위한 절박함인 것일까, 지성의 희생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라도 인정하는 그들만의 참된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참고자료2> 이번 기획 기사 속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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