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②
▣ 외세의 힘을 빌려 천주교를 보호하다
제주민란 사태를 보고받은 뮈텔은 서울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즉시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연락해 ‘제주에서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이 무고하게 공격받고 있다’며 보호를 요청했다. 플랑시는 이를 대한제국 정부에 전달했고 정부는 제주에 군병을 파견하기로 한다. 급기야 한 신부가 살해됐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뮈텔은 직접 프랑스 해군 제독 포티에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뮈텔과 긴밀히 교류하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도 가담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샌즈는 당시 고종의 궁내부 고문을 맡아 황제의 정책과 대외 문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반란군이 항복하려하지 않으니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불가불 무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며 고종에게 병력 증파를 요구했다.¹²⁾ 그러나 정부 지원군이 본격적으로 도착하기도 전, 뮈텔이 요청했던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제주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민란은 이미 진압 국면에 들어갔고, 이후 이재수 등 민군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민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처럼 뮈텔의 요청에서 시작된 외교적 압박은 대한제국의 군병과 프랑스 군함이 동시에 제주로 향하는 군사 개입으로까지 확대됐다. 뮈텔의 대응은 외국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무력적인 방법이었는데, 이는 제주민란으로부터 100년 전, 황사영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천주교의 태도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맞서 대항하는 선교 방식과 제국주의라는 막강한 배후를 갖고있었다는 배경에서, 그들의 선택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평가된다.¹⁰⁾
또한 뮈텔이 비판 받는 점은 정작 민란의 원인이 된 교폐는 외면한 채 천주교 신자들의 피해만 부각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폐를 청산할 의무와 권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봉세관의 수탈과 일부 천주교 신도들의 작폐를 시정해달라던 민란 주도자들의 요구에는 귀를 닫고, 무력 진압을 선택한 것이다.
민란 주도자들은 처음부터 무력 시위를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 유배돼 있던 대한제국기 관료 김윤식이 제주민란 현장을 기록한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의하면 먼저 선제공격을 한 것은 천주교 측이었다.
당시 도민들은 봉세관의 수탈과 천주교도의 횡포 시정을 요구하며 민중 집회를 열었는데, 이를 민회(民會)라 불렀다.
5월 13일 일기에 의하면 한 신부가 모여있는 도민들을 찾아가 먼저 민회를 해산하면 교폐를 청산하겠다 제안하였으나, 도민들은 구체적 조건을 의논하고 관청의 도장까지 받아야 믿을 수 있다며 해산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4일부터 총격이 시작되었다. 김윤식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5월 14일, 천주교인들이 도민의 두목을 찾다가 총을 쏘니 도민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므로 그 두목 6명을 잡아 신부에게 넘긴다.”, “5월 15일, 듣건대, 천주교인이 총을 쏘아 2명 또는 6명을 죽였다 하다. 또 대정군의 소식을 듣건대, 천주교인 수 백 명이 총을 쏘면서 성으로 들어가니 성 안이 텅비고 (…) 천주교인들이 군기고 문을 부수고, 총, 칼, 포, 화약을 차지하고 도민의 무리를 향하여 총을 쏘아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은 배를 맞아 거의 죽게 하고 또 2~3명을 죽게 하다. 천주교인들이 칼을 차고 총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니 그 기세가 당당하다.”¹⁰⁾
이 사건은 민란 촉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1901년 10월 9일 재판에서 민란 지도자 이재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천주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서적을 배웠다 하더라도 본래 우리나라의 신민이다. 그런데 한번 천주교에 들어가면 관청에서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들도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섭해도 아무도 감히 따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제대로 죄를 묻지 못했다. 백성들이 세금의 폐단을 견디지 못해 함께 모여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천주교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군기를 빼앗고 성을 점거해 총을 쏘았다.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죽인 자들은 바로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 이재수의 진술에 의하면, 천주교인은 종교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에 횡포를 부린 민족 반역자였고, 민란은 역적을 처단하는 일이었다.¹⁴⁾ <자료6>
뮈텔도 천주교 신자들이 저지르는 교폐 상황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뮈텔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횡포가 드러날 가능성’을 걱정했다.¹³⁾ 그리고는 그 폐단에 맞서 일어난 민란 주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만 주력했다. “나(뮈텔)는 그들이 엄한 벌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플랑시 씨를 찾아갔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뮈텔은 플랑시, 샌즈, 크레마지(대한제국 정부가 고용한 프랑스인 법률고문)등 그와 가까운 인맥을 통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제주민란 사건에서 드러난 뮈텔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편향적인 대응은 교회가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이 무엇에 따라 달라지는 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자료6> 1999년 영화『이재수의 난』포스터와 스틸컷
제주민란은 민란 지도자 이재수의 이름을 따 이른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이재수는 재판 과정에서 천주교인도 교인이기 이전에 같은 민족일진데, 같은 민족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고, 세폐 문제를 호소하는 중에 총격을 가하니, ‘우리가 죽인 그들은 민족 반역자, 곧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 순교자 묘역, 정난주의 묘, 삼의사비
뮈텔은 주모자 처벌에 그치지 않고, 피살된 천주교도들에 대한 배상과 희생자 묘지용 토지 제공도 요구하였다. 이에 제주 황사평에는 천주교도들의 집단묘역이 마련되었는데, 오늘날 이곳은 ‘순교자’들이 묻힌 성지로 조성되었다. 제주시 외곽에 자리한 황사평 성지다. 입구를 지나 성지 안으로 들어가면 안내소와 묘역이 펼쳐지고, 중앙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모습을 드러낸다.<자료7> 비석의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운 의미를 적어놓았는데, 비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이 곳 제주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신앙의 선각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선배들의 순교정신을 받을어 복음 선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삼가 이 비를 세운다.”
<자료7> 제주 황사평 순교자 묘역
본래 제주민란 당시 피살된 천주교도들이 묻힌 집단묘역이였으나, 1995년 ‘순교자’ 묘역이라며 성지로 조성했다. 제주민란의 역사를 잘 모르는 신자나 관광객들은 교폐라는 민란의 배경은 모른 채, 이곳에 묻힌 이들을 폭동속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로 기억할 것이다.
제주민란의 교폐를 생각할 때, 또 오늘날 제주도에서의 선교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당시 제주민란이 끼친 부정적 영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 곳에 묻힌 이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순교의 정의에 부합하는 인물일까? 이 질문의 답과는 상관없이, 이들을 순교자로 기리는 행위는 추모하는 이들로 하여금 교폐는 망각시키고, 교인이 살해되었다는 피해만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제주에는 순교 정신을 기린다는 성지들이 더 있다. 그중에는 백서를 썼던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도 있다. 정난주는 남편의 죄에 연좌돼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유지한 채 살았다는 이유로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증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2015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순례길 ‘정난주 길’이 조성되기도 했다. 정난주의 묘를 소개하는 안내 표지판에는 그녀를 기리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남편 황사영에 대한 설명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자료8> 표지판 속 황사영은 ‘선교를 위해 박해의 실상을 알리려다 장엄하게 순교당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백서를 소개할 때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라고만 짧게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들이 무엇을 기억시키고 무엇을 지우려는지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자료8>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의 묘 안내 표지판
천주교는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의 묘도 성지로 조성했다. 남편의 죄로 유배됐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며 ‘신앙의 증인’으로 기리는 것이다. 그녀의 묘 안내판에는 백서 사건도 소개되는데, 마치 박해 상황만 전한 듯 백서의 내용을 상당히 축소시켜 놓았다.
이처럼 묘비나 안내판에 쓰여진 내용에는 묘역을 조성한 이들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제주 대정마을에 세워진 ‘삼의사(三義士)비’에도 그 비석을 세운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삼의사비는 제주민란을 이끈 세 의사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그 뒷면에는 제주민란의 배경과 과정, 결과 등이 설명되어 있다. 비석에서는 민란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사적 형벌)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비석을 세운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위 내용들을 새겨넣었을까. 삼의사비는 비문의 가장 첫 문장에 비석을 세운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자료9>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자료9> 삼의사비 뒷면의 비문
이 비석이 주는 교훈은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이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는 제주도에,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 공존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제주민란 당시만 해도 뮈텔은 서양의 인맥이나 대한제국의 지도부와 접선해 그 권력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02년 뮈텔은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교황이 보낸 친필 축하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한제국 정부와 로마 교황청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었다.¹³⁾ 그런 뮈텔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세력을 키워가던 일본이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신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천주교의 확산을 억제해온 역사가 있는 나라다. 16세기 말, 한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빠르게 세력을 넓혔으나, 그 과정에서 개종 강요, 사찰 파괴, 노예 무역 등 각종 폐해와 사회적 충돌을 일으키며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면 금지당했다. 공식적으로 금교가 해제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고, 그 무렵 한국에 파견된 뮈텔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를 살펴보고 참고했던 만큼, 일본이 천주교를 배격해 온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은 뮈텔의 고국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와 대립 중이었으며, 뮈텔이 담당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에, 일본은 여러모로 경계해야 할 국가였다.
그런데 1905년 국제정세가 뒤집혔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같은 해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실질적인 권력이 빠르게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이전까지는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해 교세를 확장하려했던 뮈텔은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일본을 아군으로 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그들의 달라진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생긴다.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인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을 때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참고 자료 >
1)『뮈텔주교일기』 7권
2) 이기경,『벽위편(闢衛編)』, 권2, 1785, 을사추조적발사건
3) 김선희,「천주교를 둘러싼 국가 척사론의 논리와 그 이격」, 2025
4) 김진소,『경향잡지』, 1989년 3월호, p. 91,92.
5) 앤서니 그레이엄 티그 譯 「황사영 백서」
6)『순조실록』, 순조 1년(1801년) 11월 5일
7) 위키백과, ‘황사영 백서’
8) 우리역사넷, ‘황사영백서사건’
9)『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2월 8일
10) 이기석, 「1901년 제주민란 이야기」, 2011
11) 박찬식, 「1901년 제주민란에 나타난 교폐와 ‘물고자(物故者)’」, 2008
12)『뮈텔주교일기』 3권
13) 김태웅,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2024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질품서 제34호」, 1901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