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터전 신앙촌

천부교 70년 특집
발행일 발행호수 2650

신앙촌은 천부교 교인들이 함께 신앙을 이어가는 곳으로, 국내외 교인들에게 신앙의 성지가 되어왔다. 하나님께서는 1957년 11월 신앙촌을 건설하시며,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생활함으로써 선한 양심을 기르고 신앙을 키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촌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은혜를 받고 죄를 멀리하며 더욱 깨끗한 마음으로 구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터전이다. 1957년 소사신앙촌을 시작으로 1962년 덕소신앙촌,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되었으며, 신앙의 실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생활과 경제의 기반이 되어왔다. 이번 천부교 역사 70년 특집에서는 신앙촌이 어떻게 건설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을 되새기고자 한다.

구원을 향한 첫째 울타리 소사신앙촌(1957.11.)

‘신앙촌’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명하신 것으로,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빈곤에 허덕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터전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공동체로 신앙촌을 건설하셨다. 주택과 생산 공장, 종교 시설을 세우시고, 교육을 중시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기관도 설립되었다. 이로써 신앙촌은 신앙과 경제, 교육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자립 공동체로 성장해 나갔다.

소사신앙촌의 건설과 산업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現 부천시 범박동)에 첫 번째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소사신앙촌은 외부의 지원 없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교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세운 첫 신앙인의 마을로, ‘건설대’로 불린 이들은 한 가족처럼 지내며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개척했다. 전기·급수 시설과 상점까지 갖춘 신앙촌은 정돈된 대규모 주거 환경으로 주목받으며 하루에도 수십 대의 관광 차량이 방문했다.

소사신앙촌에서는 간장, 연탄, 피아노, 플라스틱 제품 등 100여 종의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여 국민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고, 당시 낙후된 한국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제품들은 ‘신앙촌 소비조합’을 통해 판매되었는데, 정직한 신앙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덕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정직과 신용의 신앙촌 제품’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산업을 바탕으로 신앙촌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소비조합은 현재까지도 신앙촌 제품을 전하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소사신앙촌에서는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었는데, 교인들은 물품을 구입한 후 계산대의 나무 상자에 자율적으로 값을 지불했다. 저녁에 계산을 맞춰 보면 1원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으며, 이는 신앙촌의 정직과 자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소사신앙촌의 ‘주인 없는 상점’

70만 인파가 운집한 노구산 집회
1958년 6월 30일부터 7월 6일까지 소사신앙촌이 자리한 노구산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집회 기간 중 폭우가 쏟아졌으나 참석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은혜의 창파를 이루며 집회는 끝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연 70만 명이 모이자 당시 정치계와 기성교단에서는 천부교의 급격한 성장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같은 해 10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만제단 건설이 시작되었고, 1960년 초 완공되었다. 오만제단은 이후 덕소신앙촌이 설립되기 전까지 예배와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며 신앙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노구산 집회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신앙촌
신앙촌은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았다. 임병직 미국 대사는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물들이 신앙촌을 시찰하고 이곳의 자립정신과 공동체 운영 방식 등을 실천하여 우리나라도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존 콜터 단장은 “이렇게 위대하게 건설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와서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 있다. 외부의 원조 없이 자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이 정도로 이루어진 것은 여러분의 정신을 보여준다. 신앙촌은 앞으로 세계적인 모범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사신앙촌은 이후 덕소와 기장으로 이어지는 신앙촌 건설의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사신앙촌 주택 단지 모습(1958년)

신뢰로 성장한 덕소신앙촌(1962.7.20)

1962년 7월 20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現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두 번째 신앙촌이 건설되었다. 서울에서 약 20km 떨어진 덕소신앙촌은 한강 주변으로 2층 양옥 주택이 그림처럼 들어서 있어 뛰어난 전망을 자랑했다. 그러나 건설 부지는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밭이라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주택과 아파트, 30여 개의 공장과 예배를 위한 종교 시설이 갖추어졌고, 소사신앙촌에서 시작된 경공업에 이어 제강·제철 등의 중공업으로 사업이 확대되며 더욱 활기를 띠었다.

또한 교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시온 제2초등학교와 시온 제2중·상업고등학교가 개교되었고, 음악과 체육이 장려되었다. 특히 시온 어린이합창단은 TV 출연, 각종 대회 수상, 레코드 제작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덕소신앙촌 운동장에서는 교단에서 주관하는 체육대회가 열리거나 신앙촌 주민들이 친선 경기를 개최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덕소신앙촌 공장지대

덕소신앙촌의 건설과 산업

하나님께서는 매일 소사에서 덕소로 출퇴근하시며 새벽부터 밤까지 건설대와 함께 일하셨다. 공사 중 누군가 부상을 당하면 즉시 축복해 주셨고, 건설대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시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어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했다.

덕소신앙촌에서는 메리야스, 양말, 수예, 양재, 편물, 담요, 타월, 비누, 화장품, 스테인리스 식기류, 기계, 전기 제품 등 생활필수품을 비롯해 제강·제철·화학 공업까지 아우르며 활발한 생산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남준 권사(기장신앙촌)는 1962년 12월 말, 하나님께서 제강 공장을 세우시며 “지금 한국에 제철 공장이 잠자고 있다. 우리가 시작하면 잠자던 자들도 깨어난다. 그래야 우리 한국 백성이 살지, 그렇지 않으면 못 산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박해정 승사(기장신앙촌)는 당시 하나님께서 “물건을 최고로 만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신앙촌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엑슬란 내복과 이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소비조합원들이 줄을 서서 구매해야 할 정도였다.

덕소신앙촌 직조공장에서 근무했던 장명이 권사(제주교회)는 “신앙촌 이불의 인기가 높아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던 때, 전도관 교인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며 생활할 수 있어 행복했다”라고 하며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기쁨과 평안이 솟아나 웃으며 일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신앙촌에서 생산한 제품 광고

국내외의 주목을 받은 신앙촌 건설

덕소신앙촌이 건설되자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1963년 한 해 동안 7만 명 이상이 덕소신앙촌을 찾았다.

1963년 8월 12일 자 신앙신보에서 김기석 교수(건국대)는 신앙촌의 생산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신앙과 경제가 조화를 이룰 때 가장 건전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일하며, 제품이 사회의 신용을 얻은 것은 확실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앙촌의 건설 자체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라며 “사람들이 아름답게 건설된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부교인의 신앙의 중심지 기장신앙촌(1970.2.28)

1970년 2월,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세 번째 신앙촌인 기장신앙촌이 건설되었다. 건설에는 덕소신앙촌 건설대와 각 공장에서 자원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했다. 기장신앙촌 부지는 하천과 논,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갯벌이 많아 건설이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누가 보아도 건축이 불가능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현장을 진두지휘하시며 축복해 주신 덕분에 대형 공장, 기숙사, 주택 등이 약 2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김도삼 승사(기장신앙촌)는 “하나님께서 매일 새벽 덕소에서 기장으로 출퇴근하시며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흙투성이가 되신 채 우리와 함께하셨다”고 전했다.

이후 덕소신앙촌의 주요 공장들이 기장신앙촌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천부교단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974년 7월 20일에는 탁아소가 개원해 유치원을 겸하여 운영되었으며, 1988년 3월 7일에는 시온실업고등학교가 개교해 현재는 SANC식품여자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합창단과 농구부 활동이 장려되었으며, 신앙촌 주민들은 체육대회를 통해 친목을 다졌다. 현재도 신앙촌에서는 합창과 체육대회가 꾸준히 열리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기장신앙촌의 산업과 성장

1970년대는 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기장신앙촌에서는 최신 기계 설비를 갖추고 7,000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며 다양한 산업을 운영했다. 특히, 시온합섬은 1971년 11월부터 1972년 10월 31일까지 1년간 미주, 유럽 등지에 모포와 섬유류를 수출해 ‘제9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62년 덕소신앙촌에서 시작된 제강 산업은 1973년 3월 31일 기장신앙촌으로 확대되며 제강 및 압연 공장이 건설되었고, 이를 통해 철강 수출이 본격화되었다. 월간 약 3,000톤의 철강이 미국, 일본, 동남아 등으로 수출되었으며, 이는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기장신앙촌의 시온철강은 건설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부여 유스호스텔 공사, 경남 기장군 일광면 고리 원자력 발전소 공사 등에 참여했으며, 1980년 1월에는 기장 삼거리에서 죽성리를 거쳐 신앙촌 후문에 이르는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신앙촌 자체 비용으로 완공했다.

기장신앙촌 식품단지(현재)

신앙촌, 신앙과 삶이 어우러지는 터전

1970년대 초에 건설된 기장신앙촌은 국내외 천부교인들에게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왔다. 현재 소사신앙촌과 덕소신앙촌이 재개발됨에 따라 ‘신앙촌’이라는 명칭은 기장신앙촌을 가리킨다.

신앙촌 입구에 이슬성신절 행사를 알리는 모습

신앙촌에서는 매월 축복일뿐만 아니라 5월 이슬성신절과 11월 추수감사절이 되면 수많은 천부교인들이 신앙촌에 모여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되새긴다.

또한, 신앙촌에서는 침구를 비롯해 두부, 요구르트 런, 장유 등 정직한 양심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고객과 견학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 전국 순회 집회와 방방곡곡에 세워진 전도관을 다니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시고자 신앙촌을 세워 주셨다.

마치 작은 숯불들이 모여 거대한 불길이 되듯, 신앙촌 건설을 통해 개인은 물론 단체와 국가, 나아가 온 인류가 바른 양심을 지키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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