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세계사 <10> ‘고해성사’로 보는 종교 집단의 민낯 … 독립운동가를 밀고하고 살인자로 단죄하다
다시 쓰는세계사 <10>1910년 3월 9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있었던 고해성사에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사형 집행을 앞둔 한국인 사형수가 가톨릭 신부를 만나 고해하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사형수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義士)였기 때문이다. <자료1>
◈ 독립운동가에게 찍어준 살인자 낙인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침탈당하고 격렬하게 항거하던 때로, 안중근 의사가 식민 지배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은 일본과 중국은 물론 이탈리아에도 보도될 만큼 국내외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 지배받는 식민지의 국민이 지배국의 최고위 정치가를 사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일본 재판부와 법 규정에 따라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안 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으나,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항변했다.
사형을 앞둔 안 의사가 고해성사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의 관심은 ‘안중근이 고해할 때 살인죄를 인정할 것인가?’에 집중됐다. 안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해 준 가톨릭 신부는 프랑스인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년~1938년) 신부였는데 그는 안중근을 만나기 위해 뤼순으로 향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이유는, 이토 처단이 하늘에 사무치는 죄이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참회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순천시보, 1910.3.15.) 이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한국인의 판단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빌렘 신부의 상관이었던 명동성당 주교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년 ~ 1933년) 또한 안중근의 의거를 ‘증오할 만한 살인 행위’라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자료2>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원수 중의 원수였으나, 뮈텔 주교는 이토가 한국에 가져다준 공적과 이익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은 슬프고 불행한 일이라며 장례식을 찾아가 조화를 바치고 애도했다.
뮈텔은 안중근이 살인 행위를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해야만 한다고 했지만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살인죄라 생각지 않았고, 사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이토를 사살한 것은 식민 지배의 원흉을 제거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1909.12.22. 안중근 10회 신문조서) 결과적으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살인죄를 범했음을 자인하고 회개하게 만들겠다는 가톨릭 신부들의 시도는 실패한 셈이었다.
당시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로 낙인찍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가톨릭도 안중근에 대해 ‘살인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안중근이 사형 집행을 당한 후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는 그의 친척을 삼엄하게 감시했는데, 이는 안중근이라는 살인자 집안에 대한 당연한 처사였으며 일본의 구미에 맞는 조치였다. 가톨릭은 일본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 덕분에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됐다.
◈ 고해의 비밀과 맞바꾼 명동성당 진입로
1911년 1월 11일 수요일, 폭설이 쏟아지는 겨울이었다. 명동성당에서 편지를 읽던 뮈텔 주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빌렘 신부가 보내 온 편지에 놀랄 만한 1급 첩보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뮈텔 주교의 손에 들어간 첩보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그만큼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안명근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의 총독부에 대항할 계획에 착수했으며 안명근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첩보였는데, 이를 얻은 경로는 다름 아닌 고해성사였다.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안명근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고, 빌렘은 고해성사에서 얻은 정보를 뮈텔 주교에게 편지로 알린 것이었다. <자료3>
편지를 손에 넣은 뮈텔은 그길로 눈발을 헤치며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1864년~1919년)를 찾아갔다. 독립운동 감시와 말살에 주력하던 아카시 총감에게 안명근은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때마침 뮈텔 주교가 그의 활동 정보를 밀고한 것이었다.
뮈텔은 정보의 효용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의 진입로가 일본 상인들 때문에 가로막혀 길을 뚫는 것이 숙원이던 뮈텔 주교는 “이 기회를 이용해” 통로를 뚫어 달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아카시 총감은 그 자리에서 헌병대 중위를 불러 진입로를 열어 놓도록 명령하는 한편, 정보를 알려 준 뮈텔 주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뮈텔이 밀고한 정보는 총독부의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귀에까지 들어갔다. 데라우치 총독이 자신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할 것을 명했기 때문에 그 명을 받들어 아카시 총감은 명동성당으로 뮈텔 주교를 찾아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위직인 데라우치 총독까지 나서서 뮈텔에게 감사를 표했던 것은 그만큼 가톨릭의 밀고가 일본에게 더없이 유용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 효용 가치를 알아보고 즉각 고해 내용을 알린 빌렘 신부와 그 내용을 받자마자 총독부에 밀고한 뮈텔 주교의 선견지명으로 명동성당은 숙원 사업을 이뤄서 넓고 환한 진입로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자료4>
◈ 뮈텔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
가톨릭의 밀고를 받은 일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당시 안명근은 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헌병대는 이 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 조작하고, 안명근과 함께 계몽 운동을 벌였던 지도자들에게 ‘총독 암살 미수죄’라는 혐의를 씌워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 김구를 비롯한 황해도 안악군의 독립운동가 160명이 검거됐기 때문에 이를 ‘안악 사건’이라고 한다. <자료5>
안악 사건은 일본이 날조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계몽 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일본은 특히 교육 증진에 앞장서는 황해도 지역에 경계를 기울였는데, 때마침 가톨릭이 밀고한 안명근의 활동 덕분에 황해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종신형과 징역형, 제주도 유배 등으로 궤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큰 규모의 탄압으로 확대했다. 안악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하는 또 다른 비밀 단체 ‘신민회’를 포착했다며 그 회원 600명을 검거한 것이다. 이중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독립운동가를 절멸시킨 사건이었다. <자료6>
105인 사건의 핵심은 대규모 조직인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모의하고 실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내용대로 자백할 때까지 일본은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증거는 오직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뿐이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마녀재판에서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받아 내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독립운동가들을 천장에 매달아 잡아당기거나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갈기는 고문, 배가 불룩해지도록 코로 물을 부어 넣는 고문은 가톨릭이 행한 마녀재판과 유사했다. <자료7>
72종에 달하는 악랄한 고문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카시 총감이었다. 아카시 총감은 뮈텔 주교에게 밀고를 받은 후로 독립운동가들을 구속시켜 끔찍한 고문으로 짓지도 않은 죄목을 뒤집어씌우는 데 능수능란했다.
105인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나 사업가, 교육가였는데 이중 두 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불구가 되었다. 105인 사건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 국내 항일 운동이 말살되다시피 한 것은 안명근의 고해 내용이 일본 손에 들어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안명근은 가톨릭 신부가 자신의 고해 내용을 밀고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30대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안명근은 일본의 고문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감옥살이로 쇠약해진 끝에 48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뒀다.
◈ 가톨릭식 신성불가침의 비밀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고해성사할 때 고해신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non ut homo sed ut Deus”,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신자의 고백을 듣는다고 한다. 신으로서 고백을 듣기 때문에 고해신부는 신자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고 고해의 비밀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준다고 한다. <자료8>
안명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이 교리대로 고해신부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는 어떤 경우에도 공개되지 않고 절대 비밀로 보호받는다.’는 교리를 믿은 것이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안중근에게 잘못이 있다면 고해신부가 원하는 대로 고해성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고해를 들었던 빌렘 신부는 살인자 안중근이 회개하기를 원했으나,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안중근은 가톨릭 세계에서 용서받지 못한 살인자가 되었다.
그런데 가톨릭의 신이 느닷없이 살인자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기 시작한 듯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뮈텔 주교는 살인죄를 저지른 자는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정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1999년 가톨릭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가톨릭 인물’에 안중근이 포함되었다. 2010년에는 ‘안중근 의사 100주기’를 맞아 슬그머니 신자 자격을 복권시키더니, 안중근 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그 업적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이로써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자랑스러운 가톨릭 신도로 안중근을 각인시킬 뿐 아니라, 올해부터는 빌렘 신부까지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로 이미지 세탁에 나서고 있다. 만약 안중근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가 고해성사 내용을 밀고해 사촌동생 안명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씨를 말려 버린 것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과거 일본과 똑같은 입장에서 망언을 일삼던 집단이 이제 완벽한 거짓말을 시도하고 있지만 때로는 망언보다 거짓말이 더 역겹다.
최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까지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이 발표한 공지를 보면, 고해성사의 비밀 엄수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떤 국가의 법이나 정치 행위로도 거스를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고해실의 신부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서’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교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도 전 세계 고해실에서는 가톨릭의 신이 고해성사를 들을 것이다. 성당 진입로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신. 추잡한 성추행으로 영혼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데 쾌락을 느끼는 신. 어쩌면 가톨릭이 결사적으로 봉인해야 할 비밀은 다름 아닌 이 신의 실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