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①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는 신문 한 면 크기의 비단에 1만 3천여 글자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약 200년 전 조선의 편지 한 장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1801년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중국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로, 비단에 쓴 편지라 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라 불린다.<자료1> 그러나 이 편지는 끝내 중국에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의금부에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 의금부의 오래된 문서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의 최고 책임자였던 뮈텔 주교가 이를 입수했고, <자료2> 이후 1925년 이 백서를 바티칸에 가져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친다. 이날 교황은 황 알렉시오(황사영의 세례명)의 편지를 읽고는 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며 편지를 제공해 주어 감사하다고 얘기했다.¹⁾ 이 편지에는 무엇이 적혀있었기에 조선 정부에서는 압수를 하고, 조선 천주교는 이를 보존해 로마까지 가져간 것일까? 또 어떤 가치를 높이 사 교황이 감사해하며 오늘날까지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황사영 백서에서 출발해 뮈텔 주교의 행적을 중심으로 매국과 종교적 신념 사이의 경계를 따라가 본다.
<자료1> 로마 교황청이 소장 중인 황사영 백서 원본
1801년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작성한 밀서의 원본. 현재 바티칸 박물관 산하 민속박물관 ‘아니마 문디’에 소장돼 있다. 비단에 적었다 하여 ‘백서(帛書)’라 불리며, 1만 3천여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출처: 제주일보)
<자료2> 명동성당 난간에 기대 선 뮈텔 주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의 구스타브 뮈텔 주교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 조선 천주교회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재임 기간 거의 매일 일기를 남겼는데, 그의 기록에는 당시 천주교회의 관점과 행보가 잘 드러나 있다. (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
▣ 황사영이 제안한 ‘조선 구원책’
임진왜란의 참화가 조선을 할퀴고 간 직후인 17세기 초, 당시 저술된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이미『천주실의(天主實義)』나 『교우론(交友論)』같은 천주교 서적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서적들을 수백 년간 아무도 배우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²⁾ 천주교는 오랫동안 조선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다. 가톨릭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임진왜란 때가 아닌 18세기 후반으로 이야기한다. 18세기 말, 외국에서 천주교를 접한 이들이 관련 서적을 들여오면서 국내에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 제사를 금지하며 자기 조상보다 신부(神父)와 교주(敎主)를 더 높이 모시는 천주교는 임금도 부모도 공경하지 않으려 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의 무리라 여겨졌으며, 또한 헛된 것과 영험(靈驗)한 것을 말하며, 귀신(鬼神)을 꾸며 현혹하는 무당(巫堂) 같은 부류,³⁾ ‘통화통색(通貨通色)’,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으로 인식되었다.⁴⁾ 또한 살기를 즐거워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형벌 보기를 우습게 여기는 점 또한 걱정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했고, 1801년에는 천주교를 믿는 것 자체로 국가의 색출과 처벌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황사영은 그해 조정의 단속을 피해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의 토굴에 숨어 백서를 써내려갔다. 수신인은 중국 베이징교구장 구베아 주교로, 백서의 내용은 자신들이 무고하게 박해받고 있다 주장하면서, ‘천주교 포교를 강제하기 위해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 청하는 얘기였다. 이때 그는 속국으로 만들 자세한 계획과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백서의 원문을 발췌해 하나씩 살펴보면, 황사영은 자신들이 조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를 천주교의 문제가 아니라 극심한 당쟁과 무식한 조선인들의 좁은 견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천주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한데 이를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할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고루하여 조금만 자기와 다른 행위가 있어도 천지간의 큰 변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유하건대 궁벽한 시골 어린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크게 울 것이니 오늘날 이 나라의 광경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의심과 두려움이 많으며 어리석으면서도 무식하고 성품이 유약하기가 천하에 짝이 없습니다.”⁵⁾
그리고는 자신들을 거부하는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를 강제하고자,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 여러 방안을 제시했는데,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교황을 통해 중국 황제에게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달라’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어떤 일이든지 중국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중국 황제께 글을 보내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고자 이렇게 청합니다. 중국 황제폐하께서 조선에 특별히 따로 칙령을 내리셔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중국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하게 하십시오.」이와 같이 간청하시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성되고 근실함을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까닭 없이 속국이 되라고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한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이 있은 연후에야 이를 구실 삼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조선 왕이 아직 어려 왕비가 없음을 이용해 중국 황실 여성과 혼인시켜 강제로 결속을 강화시키는 방법 등을 제안했지만, 그중에서도 황사영이 특히 비판받는 대목은 외세의 군사력을 동원해 조선을 협박하고, 선교의 자유를 강제로 받아내려 한 구상이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데다가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군사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글과 사리에 밝은 중국인 선비 서너 명을 대동해 조선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통첩을 보내십시오.
「우리는 서양의 선교하는 배요,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마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 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자료3>
<자료3> 황사영의 초상과 백서 내용의 일부
천주교 신자 황사영은 ‘포교를 강제하기 위해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중국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려다 적발되었다. 황사영은 대역죄로 처형당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매국 행위로 비판받고 있다.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유배 18년, 정약용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KBS 역사스페셜 「정약용 3형제, 과연 신(神)을 버렸나」,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그럼에도 황사영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러한 행위를 조선을 구원하는 일, 선교를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치심에 의거하면, 선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성경에서 타락과 죄악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우리 천주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 계획은 압도적 군사력을 크게 과시하여 선교를 받아들이게 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온힘을 다하여 도모한다면 어찌 이 손바닥만한 땅을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백서를 중국으로 보내려던 그의 계획은 뜻밖의 변수로 무너졌다. 백서 작성을 함께 논의한 황심(黃沁)이 체포되면서 배론의 은신처가 발각됐고, 토굴을 급습해 황사영을 체포하며 백서도 압수된 것이다. 백서의 계획이 정당하다던 그의 주장과 달리, 체포된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 大逆不道罪)’ 즉, 국가와 군주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반역이자 인간과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극악한 행위로서 처형되었고, 이 사건을 기록한 『순조실록』의 사관은 백서에 대해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었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었다(字字凶肚句句逆腸)’라고 적었다.⁶⁾ 백서 사건 이후, 조선에서 황사영 백서는 ‘흉서(凶書)’로 규정되었고, 이미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했던 조정의 방침은 백서라는 증거를 통해 힘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기존의 사학이라는 인식에 더하여 천주교는 ‘매국(賣國)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고,⁷⁾ 천주교인들은 ‘서양 세력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집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⁸⁾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 달리, 천주교에서는 황사영을 ‘순교자’로 기리고 있으며, 백서를 작성했던 배론의 토굴은 ‘성지’로, 그의 묘소는 ‘가톨릭 순례지’로 기념하고 있다.<자료4> 나아가 2013년에는 순교의 공을 높이 사 황사영을 시복 추진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뮈텔 주교는 백서의 가톨릭적 가치를 인정해 보존·번역하여 교황에게 선물했고, 오늘날까지도 바티칸 박물관에 고이 소장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황사영의 판단은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그가 신봉한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사영 사건으로부터 65년 뒤, 그가 구상했던 것과 유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외세가 군함과 병력을 앞세워 조선에 선교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다만 그 외세는 중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자료4> 황사영 토굴과 황사영의 묘
황사영은 조선의 멸망까지도 각오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천주교 포교를 꾀했던 인물로, 한국인 입장에선 매국자지만 천주교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기린다. 또한 백서를 작성한 배론의 토굴은 천주교 성지로, 그의 묘는 순례지로 조성했다. (출처: 가톨릭굿뉴스 성지/사적지 앨범, 한국관광공사)
▣ 병인양요, 제주민란으로 이어지다
1866년 가을, 프랑스 군함이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그해 3월,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된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서 금지된 종교였는데,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 몰래 입국해 비밀리에 불법으로 포교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사학을 퍼뜨린 죄로 이들을 처형했고,⁹⁾ 살아남은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사태가 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처형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강화도를 무력 점령했다. 조선군의 저항에 막혀 결국 철수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와 각종 서적·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 즉 병인년에 서양 세력이 일으킨 소요사태다.<자료5>
<자료5> 김기서作『병인양요』갑곶전투도, 서울전쟁기념관 소장
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해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선교사들은 허가 없이 입국해 비밀리에 포교를 계속했다. 이들을 처형하자 프랑스는 보복을 명분으로 강화도를 침공했고, 이 사건은 조선 사회의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키워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출처: 서울전쟁기념관)
병인양요는 선교사들의 무법적인 행태와 서양 세력의 횡포를 조선 사회에 각인시켰고, 이는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밀려오는 제국주의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고, 결국 1876년 일본의 무력 압박으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강제로 문호가 개방된다. 이후 조선은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 각국과 차례로 수교했으며,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고종은 병인양요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라는 증표를 주었다. 글자 그대로 ‘나를 대하듯 하라’는 뜻으로, ‘왕이 직접 신분을 보증하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보호패였다.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 각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고, 천주교의 선교 자유도 점차 넓어졌다. 여기에 더해 조선 천주교의 수장 뮈텔 주교는 1895년에 고종을 만나 병인박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받았으며, 1899년에는 조선 정부 관리와 교민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 내 선교의 자유를 더욱 확실히 공인받았다. 그런데 선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곳곳에서 주민들과의 갈등도 잇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곳은 바로 제주였다.
▣ 제주에서 일어난 천주교의 횡포, 교폐
1901년 제주도에서는 대규모 민중 봉기 ‘제주민란’이 일어난다. ‘신축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이 민란은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맞선 민중 항쟁이었다. 당시 제주 민중을 짓누른 것은 ‘세폐(稅弊)’라 불렸던 무거운 세금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특수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가 겹치면서 ‘교회로 인한 폐단’ 이른바 ‘교폐(敎弊)’도 커지고 있었다. 이 두 폐단은 제주민란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데, 더욱 주목할 것은 ‘교폐’라 할 수 있다. 당시 봉세관(세금 징수관)의 무리한 징세는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지역에서도 세폐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교폐까지 겹쳤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보지 못한 커다란 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한 것이었다.¹¹⁾ 그렇다면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교폐는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
병인양요때 프랑스 신부들이 받은 ‘여아대’ 패는 성당을 치외법권지대로 변모시켰다. 온갖 패악질을 하더라도 성당으로 달아나면 관아에서 체포할 수 없었다. 이 위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도들은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천주교 신자인 봉세관 강봉헌과 결탁해 온갖 무리한 세금 징수와 금품 갈취, 토지 갈취에 앞장서는가 하면, 제주도민들이 신성시해온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파괴하고, 교회 책자를 강매하며 입교를 강요했다. 당시의 천주교는 제주도의 풍습과 문화 전체를 ‘사탄’, ‘적’ 또는 ‘마귀’라는 시각으로 보았고 이들은 완전히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뮈텔 주교도 개종 하기 전의 제주도민들을 ‘사탄의 권력 밑에 있던 영혼들’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¹⁰⁾ 이러한 시각들이 토착 문화 말살과 입교 강요를 자행할 수 있었던 종교적·정신적 배경이었다.
또 다른 교폐로는 타인의 무덤 부지를 침범해 멋대로 매장하는 사례, 오래전에 매매하여 시가가 몇 배 오른 토지와 가옥을 과거의 낮은 가격으로 억지로 빼앗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실례로 ‘천주교회에 입교한 홍신규가 교회의 힘에 의지하여 향리 송성은에게서 예전에 내다 판 가옥과 집터를 본래 가격으로 되찾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홍신규 사례뿐만 아니라 교회 세력에 의지해 새로 입교한 교민들이 예전에 불리하게 팔았던 토지를 헐값으로 되찾는 사례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된다. 나아가 토지의 소유권과 경작권을 강제로 탈취해버리는 일도 빈발했는데, 이는 재산을 둘러싼 기존 관행과 법적 처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¹¹⁾ 심지어 강력범죄인 살인과 폭행, 성범죄까지 저질렀지만, 체포는커녕 살해된 시신의 검안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사사로이 부녀자를 겁탈해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실례로 ‘교인 강기봉이 교인임을 빙자해 여인을 강간하고 아이를 낳게 하는 등 사악한 폐습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인이 이런 죄를 지어 감옥에 잡아들이기라도 하면, 교인 또는 프랑스인이라는 무리들이 찾아와 감옥을 열고 데려갔으며, 관아에 잡아들인 다른 죄인들까지 천주교인이라 주장하며 빼내가는 지경이었다.
천주교 신부들의 정교유착이 이 정도로 심해지자, 일부 주민들은 관아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천주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일반 주민들도 개종하기만 하면 천주교 신부를 등에 업고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간통한 자에게 돈을 징수하던 마을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개종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기선, 오시평, 오치효, 임재득 등 입교 전에 간통 경력이 있는 사람이 천주교민이 된 경우가 다수 확인되었고, 이렇게 간통 등으로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당시 교회는 ‘혼인 생활이 문란한 사람들의 피신처’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다.¹¹⁾ 이처럼 제주에서는 신앙이 아닌 권력의 보호막이 개종의 동기가 되는 기형적인 상황까지 벌어지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한 교폐에 시달린던 제주 민중의 분노는 대규모 봉기 제주민란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의 최고 책임자였던 뮈텔 주교는 이 소식을 듣고 국내·외 온갖 인맥과 권력을 동원해 사태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 그의 대응에서는 몇 가지 비판점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지나치게 외세 의존적이며 무력적이었다는 점, 교폐는 외면한 채 천주교 신자들의 피해만 부각시킨 점, 폐단 시정 요구는 무시한 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