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55>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①
지난 6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대성당은 수십 년 동안 분실되었던 한 성유물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파편’이라 주장하며 ‘성십자가’라 부르는 유물이었다. 산후안 대성당이 보관하던 것은 두 조각의 작은 나무 파편이었는데, 1944년 지진으로 행방불명 되었다가 최근 근처 학교의 예배당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자료1> 대성당 측은 이를 성당으로 다시 가져오며, 그 이유를 “시민들과 매일 성당을 찾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라고 밝혔다.
성십자가 유물은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게 하는 중요한 시각적 도구다. 이에 많은 성당에서 성십자가라 주장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그 나무 조각을 다 모으면 배 한 척을 짓겠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많은 유물 중, 실제 예수가 못박혔다던 유물이라 증명된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대부분은 검증조차 하지 않았으며, 검증을 시도한 몇몇 유물들은 예수가 사망했다던 1세기가 아닌 10~12세기 중세의 산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유물의 진위보다 유물에 대한 신심을 우선시하는 방침을 내세워왔고,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나무 조각들이 세계 곳곳의 성당에서 성십자가로 숭배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성십자가의 진위 여부를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는 주장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상징이자 정체성인 십자가 처형이 거짓이라는 폭로에는 어떤 합리적인 증거가 있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증거와 기록들을 추적해 본다.
<자료1> 신자들에게 성십자가 유물을 보여주는 모습과 유물함 내부 확대 사진
산후안 대성당에서 한 신부가 성십자가 유물을 신자들에게 보여주며 돌아다니고 있다. 작은 나무 조각 2개를 십자 모양으로 엮어 십자가 모양 유물함에 넣은 것이다. 이것이 실제 예수가 못박혔다다던 유물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신자들은 이 유물 앞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
(출처: 산후안 대성당 유튜브 캡처, 제니트)
▣ 십자가 처형에 의문을 제기하다
1979년 튀니지 사막. 영화「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편집자 줄리언 도일은 갑작스런 의문에 휩싸였다. 문제의 장면은 십자가 처형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죄수들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이동하는 씬이었다.<자료2> 사람이 매달릴 만한 크기의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고, 제작진은 배우들을 위해 실제보다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건장한 배우들이 그것조차 버거워하며 휘청거렸다. 그 순간 도일은 자신이 평생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기독교 서사에 처음으로 의심을 품게 된다.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됐다던 예수가 거대한 통나무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도일은 기독교 전승과 예수의 처형 이야기를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의심 없이 넘어갔던 문제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그는 성서비평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의 여러 모순점을 수십 년간 연구해 온 끝에, 그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료2> 영화「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중 십자가를 메고 이동하는 장면
영화「라이프 오브 브라이언」은 예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얼떨결에 메시아로 오해받는 한 남자 브라이언을 통해 종교적 맹신, 군중심리 등을 풍자한 블랙코미디 영화다. 영화의 결말부에는 죄수들이 십자가를 메고 이동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줄리언 도일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실제로 재현해보니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에 도일은 일반인이, 특히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됐다던 예수가 사람이 매달릴 정도의 거대한 통나무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랐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도일은 성서비평 연구에 몰두했고, 십자가 처형의 여러 모순점을 수십 년간 연구해 온 끝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출처: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스크린샷)
그의 결론은 익숙히 알려진 이야기와 달랐다. 예수의 처형 사건은 너무나 익숙해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 대중들마저 역사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사건이라면 그 진위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 행정 기록, 또는 주변 문헌 어딘가에 예수 처형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려 로마를 뒤흔든 신흥 종교의 지도자가 공개 처형당한 사건이다. 게다가 추종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죽음 순간 대낮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으며, 사흘 뒤 부활하여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전대미문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당대 역사가들이 앞다퉈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1세기 예수가 활동하던 지역의 역사 기록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록한 동시대 문헌은 없다
예수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그가 죽은 지 백 년 이상 지난 후에 작성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기록된 시점의 간격이 벌어질수록 사료로서의 신뢰도와 가치는 떨어진다. 말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정보가 와전되고 가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기록은 예수가 살던 당시인 1세기 경 활동하던 인물들의 저술이다. 그런데 조사 결과, 이런 기록들에서는 당대 특별한 사건, 반란자에 대한 처벌 기록, 심지어 일개 범죄자의 처형 기록까지 상세히 적혀있었으나, 예수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먼저 예수(BC 4 ~ AD 30/33)와 정확히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 20 ~ AD 50)의 기록을 살펴본다.<자료3> 필론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친 인물로, 유대인이었던 그는 당시 유대 정세에 정통했다. 그의 저서『가이우스에게 보낸 사절단에 관하여(On the Embassy to Gaius)』에는 빌라도 총독의 잔혹한 통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필론이 빌라도라는 인물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는 점은 예수의 기록을 추적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하다. 성경의 주장대로라면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바로 그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료3> 1세기 유대 철학자 필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예수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활동한 1세기 유대 철학자로, 유대 정세에 정통하며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저작중에는 예수를 처형했다는 빌라도 총독이나 역대 유대 왕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한 언급은 흔적조차 없다. (출처: 브리태니커)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로마의 속주로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빌라도는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대 담당 총독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서기 26~36년이었는데, 성경의 주장에 따르면 빌라도는 서기 30년에 예수를 처형했다. 그런데『가이우스에게 보낸 사절단에 관하여』를 비롯한 필론의 방대한 저작 어디에도 ‘예수’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필론은 당대의 정치적 사건과 유대 사회의 갈등을 주로 다뤘다. 예를 들면 그는 서기 3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반유대 폭력 사태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저서 『플라쿠스에 대하여(Against Flaccus)』에는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가 유대인 장로 38명을 극장으로 끌고 나와, 채찍질로 공개 처벌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처형당한 사람들의 신분과 숫자, 처형 방식까지 정확히 기록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인 서기 30년경,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며 추종자들을 이끌다 반역죄로 공개처형 됐다는 인물인 예수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BC 4 ~ AD 65)도 예수와 정확히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는 사도 바울(AD 5 ~ AD 65)과도 동시대에 로마에 거주했다. 로마 사회에서 실제로 한 신흥 종교가 급부상하고 있었다면, 인간 사회와 도덕, 종교적 현상을 깊이 탐구하던 세네카는 그 존재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에서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침묵이 불편했던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세네카와 바울이 서신을 주고받았었다며 편지 14통을 만들어냈다.<자료4> 세네카와 바울이 죽은 지 300여 년이 지나서야 갑자기 등장한 이 위조 편지는 세네카가 쓴 것처럼 꾸민 8통과 바울이 쓴 것처럼 꾸민 6통으로, 세네카는 바울과 기독교의 사상을 극찬하고 바울은 세네카를 기독교 진리에 거의 접근한 철학자라며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일례로 14번째 편지에는 바울이 세네카에게 “당신의 지혜는 이미 그 경지에 거의 닿아 있으니, 이제 수사학의 재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새로운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기독교 전파를 권유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세네카를 바울의 제자 비슷한 위치로 끌어내려, 기독교 진리에 감화된 철학자로 연출한 문장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신학자 필립 샤프는 그의 저서『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이 편지들은 사상과 문체가 매우 빈약하고, 연대와 역사에 오류가 많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위조된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영국의 신학자 JB 라이트풋도 “위조자의 손길이 명백히 드러난다”고 지적하였다.
자료4> 왼쪽부터 네로 황제와 철학자 세네카, 기독교 사도 바울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예수와 정확히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그는 사도 바울과도 동시대에 살았다. 로마 사회에서 실제로 한 신흥종교가 급부상하고 있었다면, 인간 사회와 도덕을 깊이 탐구하던 세네카가 관심을 가졌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저작에서 예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자 4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세네카와 바울이 서신을 주고받았었다며 위조 편지 14통을 만들어냈다. 편지의 내용은 세네카가 바울과 기독교의 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 점, 두 사람의 평소 문체와 다른 점, 연대상 오류가 있는 점, 4세기 초반까지 누구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학계는 이를 두 인물이 살았던 1세기가 아니라, 4세기 중엽에 제작된 위조 문서로 판정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이처럼 편지의 내용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 점, 두 사람의 평소 문체와 다른 점, 연대상 오류가 있는 점, 4세기 초반까지 누구도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학계는 이를 두 인물이 살았던 1세기가 아니라, 4세기 중엽에 제작된 위조 문서로 판정하고 있다.
예수가 자라고 활동했던 지역인 갈릴리 출신의 역사가도 있었다. 1세기 역사가 유스투스(AD 35 ~ AD 100)는 갈릴리 지역에 살면서『유대 왕들의 연대기(A Chronicle of the Kings of the Jews)』를 집필했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도 성경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 혐의로 처형됐다던 예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에 9세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자신의 저서『비블리오테카(Bibliotheca)』에 “유스투스는 모세 시대부터 아그리파 왕까지의 유대 역사를 다뤘으나, 예수의 출현이나 기적 등 그에 관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며 비난했다.<자료5> 유스투스의 신뢰도를 폄훼하려던 포티우스의 의도와 달리, 그의 비난은 오히려 유스투스의 1세기 기록에 예수가 없었다는 확실한 증언이 되었다.
<자료5> 포티우스와 1606년 판『비블리오테카』표지
9세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이자 성인인 포티우스는 자신의 저서『비블리오테카』에서 갈릴리 출신 역사가 유스투스가 유대의 모든 왕의 역사를 다뤘으나 예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며 비난했다. 유스투스의 신뢰도를 폄훼하려던 포티우스의 의도와 달리, 그의 비난은 오히려 유스투스의 1세기 기록에 예수가 없었다는 확실한 증언이 되었다. (출처: HistoryofInformation.com)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면 간접적인 단서로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가 처형당해 죽는 순간 대낮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기록한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1세기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AD 23 ~ AD 79)는 자연계의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37권짜리 백과사전『박물지(博物誌, Naturalis historia)』를 집필했다.<자료6>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의 서문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태도로 방대한 자연 현상을 수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박물지 2권에서는 대낮이 어두워지는 개기 일식과 땅이 흔들리는 지진 현상을 광범위하게 다뤘다. 특히 박물지 2권 64장 <지진 발생 시 나타나는 놀라운 상황>에는 예수가 활동했던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AD 14 ~ AD 37 재위)에 일어난 지진 기록도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큰 지진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발생했는데, 이 지진으로 아시아의 12개 도시가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었다. 서기전 2세기 포에니 전쟁 중에는 지진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여, 로마에서 한 해 동안 57번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플리니우스가 과거의 기록은 ‘전해진다’고 표현하고,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는 ‘우리가 기억하는 지진’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지진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지진은 언급하면서 예수의 죽음 순간 일어났다던 예루살렘에서의 지진은 언급하지 않았다.
자료6> 대 플리니우스와 1669년 판『박물지』표지
1세기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자연계의 다양한 사물과 현상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37권짜리 백과사전『박물지』를 집필했다. 박물지 2권에서는 예수가 활동했던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일어난 지진도 언급되어 있었는데, 아시아에서의 지진은 기록한 반면, 예수의 죽음 순간 일어났다던 예루살렘에서의 지진은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번에는 의무적으로 기록을 남겨야 했던 로마의 행정 기록을 살펴본다.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행정 기록을 철저히 남겼다.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반역죄를 저지른 정치범이었기에 그 죄명과 처형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이집트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군에는 세금 문서, 재판 관련 서신, 체포 명령서, 형벌 집행 지시 등 일상적 행정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3035(P. Oxy. XLII 3035)는 로마 당국이 발행한 기독교인 체포 영장으로, 서기 256년 2월 28일 옥시린쿠스 통치 평의회 의장이 시골 마을의 경찰에게 기독교인 페토라사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파피루스 문서에서는 또한 범죄자들의 처벌 기록도 확인할 수 있는데, 로마 당국은 범죄자에 대해 이름, 죄목, 채찍형·노역형·추방형 같은 처벌 방식 등을 명시했다. 예를 들면 출판번호 SB.20.14631의 파피루스는 이집트 총독의 석방 명령문으로, 서기 139년 페테수코스라는 사람이 광산 노역형 5년형을 마친 뒤 석방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또 유대 사막에서 발견된 P.Cotton 파피루스는 유대와 아라비아 속주의 재판 문서로, 129~132년경 여러 개인에 대한 재판 기록이 담겨 있다. 일례로 반란 가담자로 추정되는 가달리아스와 사울로스라는 사람들이 노예 매매·해방 관련 문서를 위조하고 세금을 회피한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로마의 행정 기록은 사소한 범죄 기록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었지만, 예수를 반역죄로 체포하라는 기록, 예수가 반역죄로 기소되었다는 기록, 예수가 채찍형이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예수의 처형을 기록한 1세기 사료는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기록이 아직 남아 있다. 바로 로마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조작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요세푸스의 기록을 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