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62>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2> ②
■ 선택적 정교분리, 3·1 운동을 금지하다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운동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비폭력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사진9> 당시 만 16세였던 유관순 열사와 같이, 어린 학생부터 농민과 상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총칼을 든 일본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의 열망이 전국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식민지하 이런 민족운동은 한국인에게 사회정의이며 자기생존권을 쟁취·보전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서, 우리 한민족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 천주교는 3·1운동 참여를 금지시켰다.11)

<사진9> 3·1 운동 기록화『3.1 만세 운동(1986년 서세옥作)』과 3·1운동 첫날 여학생들과 시민들이 양팔 벌려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모습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비폭력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남녀노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거족적으로 참여했으며, 여학생과 여성들도 시위의 선두에서 독립 의지를 외쳤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은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얘기한 바 있다. 3.1 운동 참여는 105인 사건 등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된 우리의 독립정신을 다시금 일깨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뮈텔 주교는 “이 나라 백성들은 독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만세운동을 “불행한 망동”이라 표현했다. 또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며 신자들이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출처: 뉴욕한국문화원, 국사편찬위원회)
뮈텔 주교는 “이 나라 백성들은 독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만세운동을 “불행한 망동”이라 일컬었고,12)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13) 3·1 운동에 참여하려는 서울 용산의 신학생들과 마주한 날, 뮈텔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나를 붙잡고 그들의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그중 여러 학생들은 이미 그런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매우 서글픈 마음으로 주교관으로 돌아왔다.”14)
신학교를 떠나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실제로 3·1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학시키며 독립운동 참여를 막았고, 퇴학당한 학생의 가족은 “저들은 얼마나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가”라며 한탄했지만,15) 그 한탄은 뮈텔에게 닿지 않았다. 뮈텔은 오히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며 신자들이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3·1 운동을 막아선 천주교 지도자는 뮈텔만이 아니었다.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또 다른 프랑스인 주교, 대구 대목구장 플로리앙 드망즈(Florian Demange)도 신자들에게 일본 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사진10> 드망즈는 우리 신자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일본 정부는 합법 정부이므로 우리 천주교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을 지켰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는 종교인도 ‘국가의 의무는 국가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의 성경 구절을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일본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사용한 것이었다.

<사진10> 플로리앙 드망즈 신부(맨 왼쪽)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은 뮈텔 주교다. 대구 대목구장 플로리앙 드망즈는 일본을 합법 정부라 인정하며, 마태복음 22장 21절을 인용해 신자들에게 일본 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만세 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 신자들을 위협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드망즈는 또한 “만세 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천주교에서 대죄란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을 만큼 중대한 죄를 뜻한다. 신자들은 대죄를 범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독립을 외치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일이 되었다.16) 이는 3·1 운동에 참여하면 지옥에 간다는 협박이자, 독립 의지에 죄의식을 부과해 신자들의 양심을 옭아매는 덫이었다.
뮈텔과 드망즈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포와요 신부는 ‘한국의 독립을 소망하는 것은 헛된 기다림’이고,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뤼카 신부, 충청도의 드비즈 신부, 경상남도와 전라도의 많은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17)
이런 문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부정하며 내세운 논리는 ‘정교분리론’이지만, 이 원칙은 일제의 강점을 인정하고 지배정책을 따르는 순간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거나 유착하지 않는다는 원칙인데,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는 행위 자체도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강력히 주장했던 정교분리원칙은 결국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일제 치하의 뮈텔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정교유착’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불법적이고 부당했으며, 그들의 식민통치는 비인도적이고 불의였다. 이러한 일제를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고 독립운동을 단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불의에 동조하는 행위였고,18) 독립에 뜻이 있는 한국인들은 3·1 운동을 대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에 분개하였다.
서병익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천주교인들이 만세군중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방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자라고 욕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한 사람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일본인들에게서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나 만세 군중들로부터는 항상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뮈텔문서〉1919-14, 서병익 신부가 의주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9년 3월 17일 서한)” 19)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인가”라고 책망하였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자들이다.”라고 비난하였다. 심한 경우 “이번에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몰살시키겠다. 성당도 파괴하겠다.”며 분노를 표출했고, 그러한 내용의 쪽지를 써서 밤중에 신자들의 집에 돌리기도 했다.(〈뮈텔문서〉1919-15, 서병익 신부가 의주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9년 3월 30일 서한) 인천에서는 등교까지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하던 학생들이 자신들과 달리 3·1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천주교계 학교를 찾아가, 운동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두 차례나 떼어간 일도 있었다. 이 또한 천주교를 향한 비난과 항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비(非)천주교 한국인들의 눈에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하고 있는 자들’이었고, 프랑스인 주교들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20)
천주교를 향한 비난은 만세를 외치던 군중 개개인의 울분에 그치지 않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질책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19년 10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이동녕의 명의로,<사진11> 천주교인들에게 보내는 ‘천주교 동포여’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신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민족운동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는데, 격식을 갖춘 문서였음에도 행간마다 분노가 묻어 나온다.
“여러분은 대한민족이 아닙니까? 전 한민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한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기를 즐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진실로 신의 뜻을 따른다면, 불의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일어나야 할 것이요,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먼저 도와야 할 것입니다. … 듣자 하니 하느님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 여러분은 일본인들에게 학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만일 천주교 동포들이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는다면, 2천만 대한민족은 여러분을 ‘일본인보다도 더 가증한 적(可憎한 敵)’으로 알겠습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7, 내무부 포고,「천주교 동포여」)” 21)

<사진11> 1920년 1월 1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이듬해 찍은 기념사진으로, 둘째 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가 내무총장 이동녕이다. 1919년 10월 15일, 이동녕은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천주교인들에게 포고문을 발표했다. “한민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까. … 만일 천주교 동포들이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는다면, 2천만 대한민족은 여러분을 일본인보다도 더 가증한 적으로 알겠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당시 천주교는 한국 동포들의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독립운동의 참여를 엄금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까지처럼 외적인 압력으로 통제하는 방식, 즉 신자들을 징계하고, 대죄로 위협하고, 제도적으로 억제하는 방식으로는 신자 개개인의 양심과 민족의식까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를 향해갈수록 한국 천주교회의 대응은 더 근본적인 요인을 통제하려 하기 시작한다. 신자들의 독립 의지 자체를 꺾고, 일본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일제에 적극 협력하도록, 근본적인 정신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1)『뮈텔 주교 일기』 4권, 1909년 10월 26일.
2)『뮈텔 주교 일기』 4권
3)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3.
4)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6.
5)『중국신문 안중근의거 기사집』, p.268,271.
6)『안중근 자료집3: 안중근 신문기록』, p.184.
7)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1.
8)『뮈텔 주교 일기』 5권, 1911년 1월 11일
9) 윤경로, 「105인 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 p.102,103.
10) “명동성당의 흑역사”, 한국공공정책신문, 2024.12.13.
11)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03.
12)『뮈텔 주교 일기』 6권, 1919년 3월 1일, 3월 23일.
13) 윤선자, 「3·1운동기 천주교회의 동향」, p.471.
14)『뮈텔 주교 일기』 6권, 1919년 3월 24일.
15)『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강원지역』, 2019, p.86,87.
16)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98.
17)『뮈텔 주교 일기』 6권, 1919년 3월 24일.
18)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03.
19)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23.
20)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26,127.
21)『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내무부, 「천주교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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