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62>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2> ①

발행일 발행호수 2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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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탄을 맞은 흰 수염의 노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총을 쏜 청년은 도망가지 않은 채 “코레아 우라!”, 러시아어로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다. <사진1> 이로써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30분 만에 숨을 거뒀다.

원수를 처단했다는 소식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기뻐했으며, 안 의사를 영웅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자가 있었다. ‘이토 공의 사망은 공공의 불행이며 증오를 일으켜야 하는 살인 범죄인데, 민중들은 오히려 기쁜 소식으로 여길뿐더러 그런 감정이 전반적’이라는 것이었다. 1) 이 같은 한탄을 한 자는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귀스타브 뮈텔(Gustave Mutel, 1854-1933) 주교였다.
그에게 있어 죄악과 불의의 기준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뮈텔 주교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일제의 식민 정책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했는지 살펴본다.

<사진1> 하얼빈역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와 의거 장면 기록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가 환영 인파 쪽으로 향하려 할 때 군중 속에서 안중근 의사가 뛰어나오며 이토를 저격했다. 안중근 의사는 그 자리에서 ‘코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쳤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위키피디아)

▣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단죄하다.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는 한국 가톨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무려 42년 동안 한국 가톨릭의 수장이었다. 공식 직책명은 대목구장(代牧區長), 즉 ‘교황을 대리해 사목하는 구역의 수장’으로 조선 구역을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뮈텔은 1890년 주교가 된 이후 임종 전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남겼는데, 그 일기에는 교회 안팎의 주요 사건은 물론, 공식 기록 뒤에 숨겨진 갖가지 풍문과 일화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사진2>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와 그의 의거를 대하는 뮈텔의 태도 역시 그 일기에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2)

사진2> 뮈텔 주교와『뮈텔 주교 일기』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무려 42년 동안 한국 가톨릭의 수장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거의 매일 일기를 남겼으며, 하얼빈 의거 당시의 기록도 있다. 뮈텔은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안중근 의사를 ‘증오를 일으킬켜야 하는 살인 범죄자’로 단죄했다. (출처: 한국가톨릭대사전)

1909년 10월 28일 – 돌아와 보니 전보 한 장이 와 있었다. “유력한 모 신문이 이토 공의 암살자가 천주교인이라고 보도함. 사실 여부 속답 바람. – 동경대주교 뮈가뷔르” 저녁 8시 반경에 답전을 보냈다. “결코 아님. – 뮈텔”

1909년 10월 30일 – 이토 공의 암살 주범이 천주교인이라는 고발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암살자의 이름을 안응칠이라고 대고 있으니, 그 이름은 안 도마(안중근의 세례명 ‘토마스’의 음역 표기)의 이름과는 다르다.

1909년 11월 2일 – 불행히도 오늘 오후 대련에서 온 전보가 우리의 모든 희망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이 전보에 의하면 안응칠이란 이름은 ‘암살범’이 여기저기서 여러 번 사용한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안중근이라는 것이다.

1910년 3월 28일 – 안도마의 사형이 26일에 집행되었다. 일본인들이 그 시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 극히 당연한 일이다.

뮈텔은 안중근 의사를 ‘암살 범죄자’로 단죄하며, 범죄자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 했다. 동경대주교 뮈가뷔르도 ‘암살자가 천주교인이 맞다’는 전보에 “안중근은 이미 교회를 떠난 사람이고, 교회를 떠난 사람이 저지른 범행이니 천주교를 비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답신을 보내며 안중근 의사와 빠르게 선을 그었다.3) 뮈텔을 비롯한 당시 교회 지도부는 하얼빈 의거를 독립운동이 아닌 ‘살인 행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천주교회가 발행하던 주간지《경향신문》역시 같은 입장을 보였다. 1909년 11월 12일,《경향신문》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이름 대신 ‘암살한 사람’이라 칭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4)

“이등 공(이토 공작)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한 줄을 알았으면 그렇게 생각지 아니 하였겠으니 … 공이 흉한 죽음 당한 것이고 … 매우 원통한 일이오. ‘암살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함으로 하였다 하나,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 일은 악한 일이니, 악한 일이라 하노라”

이처럼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이토의 처단을 ‘악한 살인’으로 규정하는 모습은 뮈텔이 드러냈던 태도와 일치한다. 뮈텔의 태도는 곧 안중근 의거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표명이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최고 통치권자였던 뮈텔은 천주교회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48명의 선교사들과 13명의 한국인 성직자들은 뮈텔의 의견을 따랐다. 한국 천주교에서 안중근 의사는 ‘회개해야 할 살인자’였다. 그런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얼마 남지 않았던 3월 8일, 한 신부가 안중근 의사를 만나기 위해 중국 뤼순 감옥으로 향한다. 그는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신부 니콜라 빌렘(Nicolas Wilhelm, 1860-1938)이었다.<사진3>

<사진3> 중국 뤼순 감옥에서 빌렘과 안중근 의사의 면회
빌렘 신부는 안 의사를 만나기 위해 중국 뤼순 감옥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뤼순까지 온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자기의 의견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이토 공작을 암살한 죄악은 하늘에 사무치므로 너를 참회하고 잘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여기에 온 목적이다” 그러면서 “이토 공작 같은 위인을 살해한 것은 죽어도 큰 죄를 면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출처: 안중근역사관)

빌렘은 안중근 의사에게 직접 자신이 뤼순까지 온 목적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은 “이토 공작을 암살한 죄악은 하늘에 사무치므로 너(안중근)를 참회하고 잘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두 방울을 안중근에게 주면서 “자네가 참회하면 신은 반드시 묻지 않고 비로소 죄를 씻을 수 있다. 그러나 이토 공작 같은 위인을 살해한 것은 죽어도 큰 죄를 면할 수 없다”고 가르쳤으며, “자네가 큰 죄를 범했는데 일본 관헌이 너에게 이렇게 관용을 베풀어 특별히 성찬 의식을 거행하게 허락하니, 그 은택이 하늘과 같아 뒤덮지 않은 것이 없다.”고 얘기했다.5)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토 처단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한 ‘의거’임을 분명히 했다. 그 근거로서 1909년 10월 30일 일본 검찰의 첫 신문(訊問)에서 이토의 죄, 즉 ‘국모를 시해하고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의 정권·자원·군대·언론·교육을 강제로 박탈한 죄’ 등을 조목조목 밝혔으며, 1909년 12월 22일 제10회 신문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악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고 분명히 답한 바 있다.6)

그리고 빌렘 신부를 만난 이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처형 직전 두 아우와 빌렘 신부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대한제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하였다.<사진4> 이는 이토 처단이 정당하고 옳은 행동이었으며, 조국 독립을 위한 의로운 거사였음을 확신하는 안중근 의사의 굳은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7) 오늘날 일본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묘지의 안내판조차 안중근 의사를 ‘조선의 독립운동가’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역사의 평가 또한 이토 처단이 ‘조국 독립을 위한 의거’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못한 채 안중근을 회개해야 할 살인 범죄자로 단죄했던 뮈텔과 빌렘의 대응은 당시 한국 천주교 지도부가 독립운동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태도는 일제를 도와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진4> 안중근 의사와 친필 유묵 ‘독립(獨立)’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까지 이토 처단이 조국 독립을 위한 ‘의거’임을 분명히 했다. 살인죄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고 답했으며, 처형 직전 남긴 유언에서는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대한제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며 굳은 신념을 보여주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명동성당 진입로를 얻고, 독립운동을 절멸시키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지 1년여가 지난 시점인 1911년 1월 11일, 서울에는 눈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날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책임자 뮈텔 주교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의 정체는 항일운동 움직임을 알리는 첩보,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거기에 안명근이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비밀스러운 정보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빌렘 신부로, 안중근을 회개시키겠다며 뤼순으로 찾아갔던 바로 그 신부였다. 어떻게 천주교 신부가 이런 비밀 정보를 입수한 것일까? 안명근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으로, 안명근 또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이를 평소 신뢰하던 빌렘 신부에게 얘기했던 것이다.<사진5> 하지만 빌렘은 이 신뢰를 무참히 배신한다. 이 사실을 아카시 장군에게 알려야 한다며 뮈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사진5> 빌렘 신부와 안명근(맨 왼쪽)
사진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 동생 안공근, 안정근. 안중근 일가는 빌렘 신부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안명근은 평소 신뢰하던 빌렘 신부에게 자신의 항일 운동 계획을 털어놓았는데, 빌렘은 안명근 몰래 이 사실을 총독부 아카시 장군에게 알려야 한다며 뮈텔에게 편지를 보냈다. (출처: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편지를 읽은 뮈텔 주교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뮈텔은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데도 눈발을 뚫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장군을 찾아간다. 뮈텔의 표현대로라면 ‘이 기회’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때마침 걸려 있던 교회의 땅 소송 문제를 유리하게 로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천주교는 명동성당 토지 분쟁으로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개인이 매입한 땅을 명동성당 통로가 침범하고 있었고, 교회는 1심, 2심에서 패소해 그 길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고 싶었던 뮈텔에게 항일운동 정보는 좋은 패였다. 뮈텔은 일본이 솔깃해할 수밖에 없는 카드를 쥐고, 독립운동가 감시와 체포를 총괄하던 아카시를 찾아간 것이다. 뮈텔은 그 정보를 넘기며 명동성당으로 가는 통로가 막혀있는 사정을 이야기했고, 이야기를 들은 아카시는 뮈텔의 밀고에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그 자리에서 즉시 두 통로를 열어주었다.8) <사진6>

<사진6> 옛 명동성당 전경,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정문,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
서울 명동성당의 진입로는 일제에 항일운동 정보를 넘김으로써 확보한 것이다. 당시 명동성당은 진입로 토지 소송에서 1·2심 모두 패소한 상태였는데, 뮈텔은 빌렘에게 얻은 정보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에게 넘기며 통로 문제를 호소했고 그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이후 일제는 안명근 사건을 빌미로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을 일으키며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이 때문에 훗날 명동성당 진입로는 ‘수많은 독립지사의 목숨과 맞바꾼 매국의 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위키피디아)

뮈텔의 밀고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빠르게 움직였다. 황해도 지방의 배일문화운동(排日文化運動)을 말살시키기 위해 예의주시해 왔던 조선총독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 일제는 밀고 내용을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捏造)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안명근뿐만 아니라 황해도 안악 일대 전체로 수사를 확대했고,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160여 명을 일제히 체포하였다. 수사에서는 잔인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이 강요되었고, 공판에서의 검사 공소장 역시 허위날조문서였다. 이런 식으로 단 2개월 만에 재판이 끝났고, 안명근과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18명이 중형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하여 이른바 ‘안악사건’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는 일제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안악사건으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한 경험을 맛본 일제는, 이번에는 평안도 등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민족 지도자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총독부는 이번에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조작 혐의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간부 및 회원은 물론이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모두 잡아들였다.<사진7> 이렇게 체포된 사람은 모두 600명이 넘었고, 그중 123명이 기소되었다. 기소된 사람들이 끌려간 곳에서는 수사를 가장해,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7> 105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압송되는 신민회 인사들
조선의 항일 민족 운동을 사전에 막기 위해 혈안이던 일제는 뮈텔의 밀고를 활용해, 안명근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한다. 이를 빌미로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하는 ‘안악 사건’이 일어난다. 불과 8개월 후 일제는 또다시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미수’라는 조작극으로 당시 최대의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이자 구국 계몽 단체였던 신민회’를 ‘무장 암살 단체’로 몰아 600명 이상을 체포, 이중 105명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 이 사건 이후로 신민회는 해체된다.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고문이 시작되면 주먹과 곤봉으로 사정없이 온몸을 후려갈겼고, 불에 달군 쇠붙이로 살을 지지기도 하고, 공중에 매달아 가죽채찍으로 때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물고문, 손톱·발톱에 대나무 못박기, 입 안에 석탄가루 쑤셔넣기 등 무려 72종에 달하는 온갖 고문법이 동원되었다. 이런 악랄한 고문방법은 이 사건을 조작한 장본인인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가 러시아에서 배워 온 고문법을 그대로 도용한 것이었다.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들도 생길 정도였으나,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차라리 모진 고문은 1초 1초 그 고통을 참아내면 되었지만, 여러 날을 굶긴 뒤 그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허기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복 속의 솜을 뜯어먹거나 창호지를 씹어 먹었으며, 심지어는 깔고 자던 썩은 짚을 씹어 삼켰다. 그 결과 고문이 시작된 지 16일 만에 검은 알변을 비로소 볼 수 있었는가 하면 몸무게가 70kg에서 44kg으로 줄어들을 정도였다.9)

본래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은 증거로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본은 원하는 대답을 할 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계속 했고, 일본 재판부는 결국 그 허위 자백으로 10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사진8> 이 때문에 이 사건은 일명 ‘105인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105인 사건’으로 독립단체 신민회원들, 항일 종교인들,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투옥되었고, 이 유례없던 대규모 지식인 압살은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 국내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와해·무력화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105인 사건의 시발점에는 안명근의 계획을 일제에 밀고한 뮈텔이 있었다. 뮈텔의 밀고 덕분에 일본이 대대적인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밀고의 대가로 얻어 낸 명동성당 진입로가 “수많은 독립지사의 목숨과 맞바꾼 매국의 길”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10)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항일운동 정보를 의도적으로 일제에 제공했던 행위는 역사적·도덕적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며, 또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반민족행위로 기억될 것이다.

<사진8> 일제강점기 재판 모습
일제강점기 재판의 판사들은 거의 다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에게만 가혹한 처벌과 약식 절차를 적용하는 불리한 판결을 하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조작한 사건이었기에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일제가 내세울 증거는 오직 ‘혐의자들의 자백’뿐이었고, 잔혹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 죽거나 불구자가된 사람들이 허다했다. 법정에 선 사람들은 “기존의 증언은 진실이 아니오,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증거요.” 라며 강요된 허위 자백임을 증언했지만 123명 중 105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출처: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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