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삶의 고비마다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1944년생으로,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영암과 진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광주로 올라온 저는 자취를 하며 계림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뒷집에 사는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그때마다 친구의 외할머니를 뵈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시던 그분은 저를 볼 때마다 “왜 기성교회에 다니냐”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1962년, 제가 자취하던 곳에 어머니가 오셨을 때였습니다. 친구의 외할머니께서 어머니가 오신 것을 아시고 친구 집으로 부르셨고, 그곳에서 어머니는 전도관에서 심방을 나오신 장시춘 관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들려주셨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나눠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생명물을 한 컵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저에게 천국에 가려면 전도관에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와 어머니는 광주 계림지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향취였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백합꽃 향기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습니다. “엄마, 좋은 냄새가 나요” 하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도 “글쎄 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향취는 예배 시간뿐 아니라 길을 걸을 때도 맡아졌습니다. 신앙촌에 갔을 때나 신축·개축 예배에 참석했을 때도 향취를 맡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나 모임이 있는 곳에는 꼭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시 광주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집회를 여시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집회 소식이 전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단 안은 2층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뒤쪽에는 아픈 몸으로 들것에 실려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신 하나님께서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집회 때 기회가 닿아 몇 차례 안수를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눈 안찰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손가락을 잠깐 대셨을 뿐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무겁고 아픈지 깜짝 놀랐지만, 안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시원해졌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목포와 광주 제단에서 배 안찰을 두 번 받기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내가 이런 귀한 은혜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1969년 결혼한 뒤에는 전남 무안에서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조산 위험이 크니 즉시 입원하지 않으면 산모와 아기가 모두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휴직을 하고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 치료와 안정을 취하면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산 후 충분히 몸조리를 하지 못한 채 다시 교단에 서야만 했습니다.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에는 신우신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큰 병원을 전전하며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왼쪽 옆구리가 칼로 도려내는 듯 심하게 아팠습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고통 속에 살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침 기장신앙촌에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는데, 그날 하나님께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저도 차례가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신장이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래?” 하시더니 아픈 부위를 손등으로 가볍게 툭 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고 나니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심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후 통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신장 약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안수나 안찰 소식이 들리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신우신염 앓을 때 약도 소용없었으나 하나님의 손길에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 뇌종양 진단받아 수술 날짜까지 잡았지만 수술 없이 건강 되찾아 하나님께 감사드려 생명물로 입관한 아버지 빙그레 미소 짓던 마지막 모습 잊지 못해 그런데 또 한 번의 큰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몸에 이상 증세가 있어 병원을 찾았는데, 처음 찾은 병원에서 뇌종양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전남대병원으로 향했고, 정밀 검사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아 수술 날짜까지 잡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셔서 한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저 역시 주변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았던 터라 두려움이 더욱 컸습니다. 그 후 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매일 약을 복용하고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수술 직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MRI를 다시 찍었는데, 검사를 마친 의사 선생님께서 “약이 아주 잘 들었으니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수술 날짜까지 잡았던 상황에서 더 이상 수술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후 별다른 치료 없이 지내다가 경과를 확인하러 몇 년 만에 다시 전남대병원을 찾았습니다. CT 촬영을 하고 의사 선생님께서 사진을 확인하시더니 아주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병에 대한 걱정 없이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일을 겪고 몇 년이 지나, 1995년에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 마음이 고우셨던 아버지께서는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집 안에 있는 생명물을 보시고는 “벽장에 놔둬도 여름철에 변하지 않으니 참 신기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에는 주변 제단 관장님들이 찾아오셔서 생명물로 씻겨드린 후 입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입관을 마치고 수의를 입혀 드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도 “교장 선생님께서 웃고 가신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비록 전도관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마지막 순간 환하게 핀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2000년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목포제단 회장 직분을 맡으시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기성교회에 다니는 동생과 장례 절차를 두고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나서서 외할머니가 평생 전도관에서 신앙생활을 해오셨다는 점을 차분히 설명한 덕분에 천부교식 장례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몸이 굳어 팔을 들어 올리면 몸통까지 따라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생명물로 정성껏 씻겨드리자마자 온몸이 노글노글할 정도로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오신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생명물로 모실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시어머니께도 제단에 한 번 나와 보시라고 권했습니다. 새벽마다 법문을 외우시던 분이었지만, 제 권유를 받아들이시고 계림제단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제단에 다니신 뒤로는 “그동안 네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내가 직접 다녀보니 여기가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다”며 고마워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저는 권사님들과 함께 생명물로 닦아드린 후 입관을 해 드렸는데, 예배를 마친 뒤 마주한 시어머니의 얼굴은 생전보다 훨씬 뽀얗게 피어 잠드신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생명물의 권능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지금 제 곁에는 기장신앙촌에서 소비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큰딸과 가까이에서 저를 돌봐주며 광주제단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신앙촌에 가면 딸이 반겨주어 즐겁고, 집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아들이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이제 제게 남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막내딸도 하나님을 깨닫고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처럼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앙체험기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진 생명물의 은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진 생명물의 은혜

(지난호에 이어) 신앙촌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실 때면,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집무실 앞마당에 물을 받아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3층 창가에서 마당을 향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집무실 건너편 건물에서 야간 작업을 하며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모두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때 들었던 축복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밤새 이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쉬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밤새 끊이지 않던 하나님의 축복 소리를 들으며 쉬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1974년, 군산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받은 생명물을 챙겨 곧바로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집에 있던 생명물로 이미 깨끗하게 피어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제가 가져간 생명물을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다음날 아버지를 석관으로 옮겨 모실 때도 그 위에 생명물을 부어드렸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꿈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발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깨끗해 보였는데, 제가 얼른 알아보지 못하자 아버지께서는 그 꿈속에서 몇 번이나 발을 보라고 하시며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셨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잘 보이지 않던 반점 몇 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 어머니께 아버지 산소를 한번 살펴봐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알아보니 생전에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분이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산소를 찾아와 술을 부으며 하소연을 하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는 곧바로 산소로 달려가 생명물을 흠뻑 부어 드리고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업무차 하나님 집무실에 갔을 때 아버지 묘소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물통에 물을 담아 오라 하시며 생명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축복받은 생명물을 아버지 묘소에 정성껏 부어 드리고 돌아오며,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1980년대에는 하나님께서 합창을 많이 장려하셨습니다. 덕소와 소사신앙촌 합창단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기장신앙촌으로 내려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합창 경연을 벌이곤 했습니다. 198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를 준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단원들의 식사와 생활까지 하나하나 살펴 주셨습니다. 연주회 당일 무대 옆에서 순서에 맞춰 단원들의 무대 입장을 돕고, 하나님과 단원들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990년 2월 하나님께서 낙원으로 가신 뒤, 생명물의 권능이 예전과 같을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무렵 기장 죽성에 사시던 한 분이 사고로 험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명물로 고인을 씻겨 드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뒤에도 생명물에 하나님의 신이 변함없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 한번 체험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70세에 신앙촌에 입주하셔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양로원에 들어가신 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저는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생명물로 씻겨 드린 어머니의 모습은 살아 계실 때보다도 몸이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명물의 은혜 가운데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릴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1994년 저는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촌상회를 개업하기 위해 점포 자리를 찾아다녔는데, 한 달 동안 어디를 가든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곁에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소비조합 활동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을 다해 일할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1999년 2월, 저는 진주 제단으로 첫 교역자 발령을 받았습니다. 소비조합을 거쳐 교역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학창 시절 군산전도관에서 하나님께서 ‘나가서 제단을 살펴보라’고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교역자가 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제게 앞으로 걸어갈 길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임 첫날 밤에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밤새 열기가 가시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그때 체험한 뜨거운 은혜가 불성신의 은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2015년경 천안제단에 처음 부임하던 날, 이미 말라 죽은 커다란 고목이 제단 안쪽을 가로막고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자칫 쓰러지면 아래쪽 주택이나 제단 건물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나무였습니다. 그 후 나무를 없애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워낙 크고 위험해 중장비 기사조차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제단으로 올라오는 길에 여느 때처럼 그 나무를 올려다보고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아랫집 부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무 어디 갔어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정말 나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올라와 있던 아랫집 부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나무 어디 갔어요?” 하고 되묻자, 부부는 “우리가 물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셋이서 함께 화단 쪽을 살펴보니, 거대한 고목은 썩은 뿌리 위에서 꺾여 다른 가지들과 세 갈래로 나란히 겹쳐진 채 이웃집 담과 접시꽃 사이에 누워 있었습니다. 담과의 거리는 불과 10cm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랫집 부부는 “하나님 믿는 교회라 다르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역시 하나님께서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지켜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안제단의 고목이 쓰러졌지만, 이웃집 담과 불과 10cm를 남겨두고 안전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느껴 교역자가 된 뒤에는 신기하게도 입안에 늘 단맛이 느껴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입안에 단물이 고이곤 했는데, 특히 새교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면 그 맛이 더욱 진해졌습니다. 천안에서 시무할 때는 그것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천안제단에는 매주 새교인들이 전도되어 자리가 가득 찼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은 몇 주 동안 예배 시간 내내 생글생글 웃으시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엇이 그렇게 기쁘신지 여쭈어보니, “사진 속에 있는 분이 우릴 보고 웃고 계세요. 제단에 다녀가면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장례가 나면 늘 곁에서 돕기만 하다가, 2025년 6월 축복일 예배를 마치고 서귀포 교인의 장례를 처음으로 직접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밤 12시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언니가 운명하셨다며 동생분이 천부교식 장례를 부탁해 오셨습니다. 생전에 천부교식 장례를 원하셨던 고인의 뜻을 따르겠다는 유가족의 연락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처음으로 직접 주관하는 장례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저는 입관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그려보았습니다. 저녁 무렵 서귀포에 도착해 제주 관장님과 교인분들과 함께 입관을 진행했습니다. 신앙촌에서 가져간 생명물을 수건에 적셔 고인의 얼굴을 덮어 드린 뒤 잠시 후 수건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피부가 부드럽게 풀려 뽀얗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고, 곁에 있던 분들도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제주 관장님은 유가족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부드럽게 풀린 고인의 팔을 직접 들어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고인은 한쪽 다리가 ‘ㄱ’ 자로 심하게 굽어 있어 관에 모시기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굽었던 다리가 반듯하게 펴졌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원 직원이 “조금 전에 가져온 그 물로 이렇게 된 겁니까?” 하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장례를 돕던 다른 직원들도 반듯하게 펴진 다리를 보고 “도대체 무슨 물입니까?” 하고 거듭 물었습니다. 제주 관장님은 “신앙촌에서 가져온 생명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물이라 아무리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장례를 직접 주관하면서 생명물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다시금 마음 깊이 느꼈고, 고인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서귀포제단에서 처음 장례를 주관하며 생명물로 고인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굽었던 다리가 펴지는 모습을 보고 감사의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 일은 장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귀포제단에서 소비조합 일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2년 동안 저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쁨과 설렘,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저 천국 들어가는 날 주 앞에 가리라”였습니다. 그 가사처럼 하나님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겸손이라 여겼던 행동 속에도 제 고집이 있었고, 게으르게 살아온 순간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도 제 뜻을 앞세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에도 부족한 저를 교역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생명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은혜를 간직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어느 날 집회장에 이슬성신이 뽀얗게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유옥례 권사(1) / 소사신앙촌

저는 1928년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에서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자라는 동안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없었던 저는 열여덟 살에 독실한 장로교 집안으로 시집가면서부터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다니면서 교회의 새벽종 치는 일과 헌금 관리를 맡아 보게 되었고 남편은 신학 공부를 한 후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했습니다. 폐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남편은 […]

하늘의 은혜 주시고 구원의 길을 깨닫게 해주신 그 사랑

김종일 관장(2) / 구리교회

그리고 박 장로님께서 성경 호세아 14장을 풀어 주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를 설명하실 때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성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매일같이 성경을 읽었으나,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 구절은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에 감탄하며 ‘그동안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이 감람나무이심을 분명히 깨달으면서 […]

전도관은 이단이 아니라 진짜 은혜가 내리는 곳임을 깨달아

김종일 관장(1) / 구리교회

저는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습니다. 경상북도 포항이 고향이신 부친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주물 공장의 기술자로 근무하셨으며 일본에서 결혼하여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 후 1944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저희 가족은 포항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여덟 살 때는 두 살 난 여동생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몹시 슬펐던 저는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남을 […]

하나님께 만 가지 은혜를 받은 나의 기쁜 인생 감사할 뿐

남삼호 관장(4) / 부산교회

그 후 저는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생명물로 낫는 것을 자주 체험하곤 했습니다. 1978년 둘째 은성이가 두 살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 중에 뜨겁게 끓인 숭늉을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아서 방에 놓았는데 그때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아이가 바가지 옆을 걷다가 그만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가지가 엎질러지면서 뜨거운 숭늉에 엉덩이와 […]

전도사가 돼 한국 땅에 나타나신 동방의 의인을 증거하다

남삼호 관장(3) / 부산교회

소사신앙촌에서 얼마간 생활했던 저는 1962년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청평의 화학부대에서 복무할 때는 주변에 제단이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길거리에서 신앙촌 캐러멜 포장지가 떨어진 것을 보고 ‘언제나 제단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얼마 후 다행히 춘천 지역 부대로 이동하면서 춘천제단에 다닐 수 있게 되어 그렇게 […]

감람나무를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설교 말씀에 푹 빠지다

남삼호 관장(2) / 부산교회

그해 12월에는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신문지상에서 하나님과 전도관에 대해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기사가 떠돌고 동네 사람들이 제단에 몰려와서 공연히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지만, 우리 교인들은 그럴수록 더욱 똘똘 뭉치며 열심히 제단에 나왔습니다. 이 역사를 가로막으려 하는 세력이 있어도 결단코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전보다 더욱 강하게 각오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59년 […]

죄를 벗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에 '내 믿을 곳은 바로 이곳'

남삼호 관장(1) / 부산교회

제 고향은 경상남도 삼천포읍 실안리(현재 경남 사천시 실안동)입니다. 청정 해역인 남해안의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지는 동네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님이 토기 공장을 운영하셔서 인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았는데 저희 삼 형제는 둘도 없는 친구요 형제로서 의좋게 지냈습니다. 그 후 육이오전쟁을 겪으며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져서 저는 철공소에서 일하는 한편으로 야간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

그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 귀한 구원 얻기를 간절히 기도

김미숙 관장(3) / 전농교회

그러던 중 안동제단에서 하나님 집회가 있을 때 그분을 데려가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에 손을 대시자마자 그분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모태 신앙이 이런가? 모태로부터 성신을 받은 사람이 이런가? 죄가 그대로 있지 않은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다 보신 것처럼 지적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

향취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기쁘고 즐겁게 예배 드려

김미숙 관장(2) / 전농교회

집회 중에 박 장로님께서 “병 나은 사람들은 다 일어나세요.” 하고 말씀하시면 “앉은뱅이가 일어섰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외쳤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집회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제 옆에는 들것에 실려 온 환자가 있었는데 며칠 동안 전혀 거동을 못하던 분이 박 장로님께서 “병 나은 자는 일어서라!” 하실 때 벌떡 일어나더니 “저도 […]

은혜를 받고 나니 기쁘고 즐거운 것을 다 표현할 길이 없어

김미숙 관장(1) / 전농교회

저는 1939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목사 손녀인 친구를 따라 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저는 예배에 빠짐없이 나가며 가끔씩 부흥집회에도 참석하곤 했습니다. 경북여고에 진학하고부터는 대구에서 지내며 봉산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교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저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예배당에 나오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데 열심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