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2>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2> ②

세계 종교 탐구 <62>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2> ②

■ 선택적 정교분리, 3·1 운동을 금지하다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운동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비폭력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사진9> 당시 만 16세였던 유관순 열사와 같이, 어린 학생부터 농민과 상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총칼을 든 일본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의 열망이 전국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식민지하 이런 민족운동은 한국인에게 사회정의이며 자기생존권을 쟁취·보전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서, 우리 한민족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 천주교는 3·1운동 참여를 금지시켰다.¹¹⁾ 뮈텔 주교는 “이 나라 백성들은 독립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만세운동을 “불행한 망동”이라 일컬었고,¹²⁾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¹³⁾ 3·1 운동에 참여하려는 서울 용산의 신학생들과 마주한 날, 뮈텔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학생들은 나를 붙잡고 그들의 나라가 이렇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려 했다.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그중 여러 학생들은 이미 그런 결심을 한 것 같았다. 매우 서글픈 마음으로 주교관으로 돌아왔다.”¹⁴⁾ 신학교를 떠나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교회는 실제로 3·1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학시키며 독립운동 참여를 막았고, 퇴학당한 학생의 가족은 “저들은 얼마나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가”라며 한탄했지만,¹⁵⁾ 그 한탄은 뮈텔에게 닿지 않았다. 뮈텔은 오히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며 신자들이 3·1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3·1 운동을 막아선 천주교 지도자는 뮈텔만이 아니었다.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또 다른 프랑스인 주교, 대구 대목구장 플로리앙 드망즈(Florian Demange)도 신자들에게 일본 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사진10> 드망즈는 우리 신자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일본 정부는 합법 정부이므로 우리 천주교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을 지켰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는 종교인도 ‘국가의 의무는 국가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의 성경 구절을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일본의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사용한 것이었다. 드망즈는 또한 “만세 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천주교에서 대죄란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을 만큼 중대한 죄를 뜻한다. 신자들은 대죄를 범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독립을 외치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는 일이 되었다.¹⁶⁾ 이는 3·1 운동에 참여하면 지옥에 간다는 협박이자, 독립 의지에 죄의식을 부과해 신자들의 양심을 옭아매는 덫이었다. 뮈텔과 드망즈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선교사들도 같은 입장을 보였다.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포와요 신부는 ‘한국의 독립을 소망하는 것은 헛된 기다림’이고,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뤼카 신부, 충청도의 드비즈 신부, 경상남도와 전라도의 많은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¹⁷⁾ 이런 문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부정하며 내세운 논리는 ‘정교분리론’이지만, 이 원칙은 일제의 강점을 인정하고 지배정책을 따르는 순간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거나 유착하지 않는다는 원칙인데,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는 행위 자체도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강력히 주장했던 정교분리원칙은 결국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일제 치하의 뮈텔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웠지만 그 실상은 ‘정교유착’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불법적이고 부당했으며, 그들의 식민통치는 비인도적이고 불의였다. 이러한 일제를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고 독립운동을 단죄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불의에 동조하는 행위였고,¹⁸⁾ 독립에 뜻이 있는 한국인들은 3·1 운동을 대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태도에 분개하였다. 서병익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천주교인들이 만세군중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사방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자라고 욕합니다. 천주교 신자는 한 사람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일본인들에게서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으나 만세 군중들로부터는 항상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뮈텔문서〉1919-14, 서병익 신부가 의주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9년 3월 17일 서한)”¹⁹⁾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인가”라고 책망하였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자들이다.”라고 비난하였다. 심한 경우 “이번에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몰살시키겠다. 성당도 파괴하겠다.”며 분노를 표출했고, 그러한 내용의 쪽지를 써서 밤중에 신자들의 집에 돌리기도 했다.(〈뮈텔문서〉1919-15, 서병익 신부가 의주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9년 3월 30일 서한) 인천에서는 등교까지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하던 학생들이 자신들과 달리 3·1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천주교계 학교를 찾아가, 운동장에 게양된 일장기를 두 차례나 떼어간 일도 있었다. 이 또한 천주교를 향한 비난과 항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비(非)천주교 한국인들의 눈에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하고 있는 자들’이었고, 프랑스인 주교들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모습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²⁰⁾ 천주교를 향한 비난은 만세를 외치던 군중 개개인의 울분에 그치지 않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질책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19년 10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이동녕의 명의로,<사진11> 천주교인들에게 보내는 ‘천주교 동포여’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신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민족운동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는데, 격식을 갖춘 문서였음에도 행간마다 분노가 묻어 나온다. “여러분은 대한민족이 아닙니까? 전 한민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30만 천주교 동포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한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기를 즐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진실로 신의 뜻을 따른다면, 불의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일어나야 할 것이요,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먼저 도와야 할 것입니다. … 듣자 하니 하느님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 여러분은 일본인들에게 학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만일 천주교 동포들이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는다면, 2천만 대한민족은 여러분을 ‘일본인보다도 더 가증한 적(可憎한 敵)’으로 알겠습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7, 내무부 포고,「천주교 동포여」)”²¹⁾ 이처럼 당시 천주교는 한국 동포들의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독립운동의 참여를 엄금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까지처럼 외적인 압력으로 통제하는 방식, 즉 신자들을 징계하고, 대죄로 위협하고, 제도적으로 억제하는 방식으로는 신자 개개인의 양심과 민족의식까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를 향해갈수록 한국 천주교회의 대응은 더 근본적인 요인을 통제하려 하기 시작한다. 신자들의 독립 의지 자체를 꺾고, 일본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일제에 적극 협력하도록, 근본적인 정신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1)『뮈텔 주교 일기』 4권, 1909년 10월 26일. 2)『뮈텔 주교 일기』 4권 3)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3. 4)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6. 5)『중국신문 안중근의거 기사집』, p.268,271. 6)『안중근 자료집3: 안중근 신문기록』, p.184. 7) 윤선자, 「안중근 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p.51. 8)『뮈텔 주교 일기』 5권, 1911년 1월 11일 9) 윤경로, 「105인 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 p.102,103. 10) “명동성당의 흑역사”, 한국공공정책신문, 2024.12.13. 11)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03. 12)『뮈텔 주교 일기』 6권, 1919년 3월 1일, 3월 23일. 13) 윤선자, 「3·1운동기 천주교회의 동향」, p.471. 14)『뮈텔 주교 일기』 6권, 1919년 3월 24일. 15)『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강원지역』, 2019, p.86,87. 16)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98. 17)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01,102. 18)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03. 19)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23. 20)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p.126,127. 21)『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내무부, 「천주교 동포여」

세계 종교 탐구
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②

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②

▣ 외세의 힘을 빌려 천주교를 보호하다 제주 민란 사태를 보고받은 뮈텔은 서울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즉시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연락해 ‘제주에서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이 무고하게 공격받고 있다’며 보호를 요청했다. 플랑시는 이를 대한제국 정부에 전달했고 정부는 제주에 군병을 파견하기로 한다. 뮈텔은 급기야 한 신부가 살해됐다는 소문까지 전했고, 다급해진 프랑스 공사는 프랑스 해군 제독 포티에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뮈텔과 긴밀히 교류하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도 가담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샌즈는 당시 고종의 궁내부 고문을 맡아 황제의 정책과 대외 문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반란군이 항복하려하지 않으니 그들을 굴복시키기위해 불가불 무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며 고종에게 병력 증파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 지원군이 본격적으로 도착하기도 전,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제주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민란은 이미 진압 국면에 들어가 있었고, 이후 이재수 등 민군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민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처럼 뮈텔의 요청에서 시작된 외교적 압박은 대한제국의 군병과 프랑스 군함이 동시에 제주로 향하는 군사 개입으로까지 확대됐다. 뮈텔의 대응은 외국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무력적인 방법이었는데, 이는 제주민란으로부터 100년 전, 황사영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천주교의 태도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맞서 대항하는 선교 방식과 제국주의라는 막강한 배후를 갖고있었다는 배경에서, 그들의 선택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평가된다.¹⁰⁾ 또한 뮈텔이 비판 받는 점은 정작 민란의 원인이 된 교폐는 외면한 채 천주교 신자들의 피해만 부각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폐를 청산할 의무와 권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봉세관의 수탈과 일부 천주교 신도들의 작폐를 시정해달라던 민란 주도자들의 요구에는 귀를 닫고, 무력 진압을 선택한 것이다. 민란 주도자들은 처음부터 무력 시위를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제주에 유배돼 있던 대한제국기 관료 김윤식이 제주민란 현장을 기록한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의하면 먼저 선제공격을 한 것은 천주교 측이었다. 당시 도민들은 봉세관의 수탈과 천주교도의 횡포 시정을 요구하며 민중 집회를 열었는데, 이를 민회(民會)라 불렀다. 5월 13일 일기에 의하면 한 신부가 모여있는 도민들을 찾아가 먼저 민회를 해산하면 교폐를 청산하겠다 제안하였으나, 도민들은 구체적 조건을 의논하고 관청의 도장까지 받아야 믿을 수 있다며 해산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4일부터 총격이 시작되었다. 김윤식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5월 14일, 천주교인들이 도민의 두목을 찾다가 총을 쏘니 도민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므로 그 두목 6명을 잡아 신부에게 넘긴다.”, “5월 15일, 듣건대, 천주교인이 총을 쏘아 2명 또는 6명을 죽였다 하다. 또 대정군의 소식을 듣건대, 천주교인 수 백 명이 총을 쏘면서 성으로 들어가니 성 안이 텅비고 (…) 천주교인들이 군기고 문을 부수고, 총, 칼, 포, 화약을 차지하고 도민의 무리를 향하여 총을 쏘아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은 배를 맞아 거의 죽게 하고 또 2~3명을 죽게 하다. 천주교인들이 칼을 차고 총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니 그 기세가 당당하다.”¹⁰⁾ 이 사건은 민란 촉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1901년 10월 9일 재판에서 민란 지도자 이재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천주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서적을 배웠다 하더라도 본래 우리나라의 신민이다. 그런데 한번 천주교에 들어가면 관청에서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들도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소송에 간섭해도 아무도 감히 따지지 못했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여도 제대로 죄를 묻지 못했다. 백성들이 세금의 폐단을 견디지 못해 함께 모여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천주교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군기를 빼앗고 성을 점거해 총을 쏘았다. 이것이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죽인 자들은 바로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 이재수의 진술에 의하면, 천주교인은 종교를 등에 업고 같은 민족에 횡포를 부린 민족 반역자였고, 민란은 역적을 처단하는 일이었다.¹⁴⁾ <자료6> 뮈텔도 천주교 신자들이 저지르는 교폐 상황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뮈텔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횡포가 드러날 가능성’을 걱정했다.¹³⁾ 그리고는 그 폐단에 맞서 일어난 민란 주도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만 주력했다. “나(뮈텔)는 그들이 엄한 벌을 받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플랑시 씨를 찾아갔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뮈텔은 플랑시, 샌즈, 크레마지(대한제국 정부가 고용한 프랑스인 법률고문)등 그와 가까운 인맥을 통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제주민란 사건에서 드러난 뮈텔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편향적인 대응은 교회가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이 무엇에 따라 달라지는 지 투명하게 보여준다. ▣ 순교자 묘역, 정난주의 묘, 삼의사비 뮈텔은 주모자 처벌에 그치지 않고, 피살된 천주교도들에 대한 배상과 희생자 묘지용 토지 제공도 요구하였다. 이에 제주 황사평에는 천주교도들의 집단묘역이 마련되었는데, 오늘날 이곳은 ‘순교자’들이 묻힌 성지로 조성되었다. 제주시 외곽에 자리한 황사평 성지다. 입구를 지나 성지 안으로 들어가면 안내소와 묘역이 펼쳐지고, 중앙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모습을 드러낸다.<자료7> 비석의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운 의미를 적어놓았는데, 비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이 곳 제주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신앙의 선각자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선배들의 순교정신을 받을어 복음 선포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삼가 이 비를 세운다.” 제주민란의 교폐를 생각할 때, 또 오늘날 제주도에서의 선교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당시 제주민란이 끼친 부정적 영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 곳에 묻힌 이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행위’라는 순교의 정의에 부합하는 인물일까? 이 질문의 답과는 상관없이, 이들을 순교자로 기리는 행위는 추모하는 이들로 하여금 교폐는 망각시키고, 교인이 살해되었다는 피해만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제주에는 순교 정신을 기린다는 성지들이 더 있다. 그중에는 백서를 썼던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도 있다. 정난주는 남편의 죄에 연좌돼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유지한 채 살았다는 이유로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증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2015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순례길 ‘정난주 길’이 조성되기도 했다. 정난주의 묘를 소개하는 안내 표지판에는 그녀를 기리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남편 황사영에 대한 설명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자료8> 표지판 속 황사영은 ‘선교를 위해 박해의 실상을 알리려다 장엄하게 순교당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백서를 소개할 때 ‘박해의 실상을 기술한 이 백서’라고만 짧게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들이 무엇을 기억시키고 무엇을 지우려는지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묘비나 안내판에 쓰여진 내용에는 묘역을 조성한 이들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제주 대정마을에 세워진 ‘삼의사(三義士)비’에도 그 비석을 세운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삼의사비는 제주민란을 이끈 세 의사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그 뒷면에는 제주민란의 배경과 과정, 결과 등이 설명되어 있다. 비석에서는 민란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사적 형벌)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비석을 세운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위 내용들을 새겨넣었을까. 삼의사비는 비문의 가장 첫 문장에 비석을 세운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자료9>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이 비석이 주는 교훈은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이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는 제주도에,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 공존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제주민란 당시만 해도 뮈텔은 서양의 인맥이나 대한제국의 지도부와 접선해 그 권력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02년 뮈텔은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교황이 보낸 친필 축하서신을 고종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한제국 정부와 로마 교황청 사이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었다.¹³⁾ 그런 뮈텔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세력을 키워가던 일본이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신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천주교의 확산을 억제해온 역사가 있는 나라다. 16세기 말, 한때 가톨릭은 일본에서 빠르게 세력을 넓혔으나, 그 과정에서 개종 강요, 사찰 파괴, 노예 무역 등 각종 폐해와 사회적 충돌을 일으키며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전면 금지당했다. 공식적으로 금교가 해제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고, 그 무렵 한국에 파견된 뮈텔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 순교자들의 시복 절차를 살펴보고 참고했던 만큼, 일본이 천주교를 배격해 온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은 뮈텔의 고국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와 대립 중이었으며, 뮈텔이 담당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도 세력을 넓히고 있었기에, 일본은 여러모로 경계해야 할 국가였다. 그런데 1905년 국제정세가 뒤집혔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같은 해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까지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실질적인 권력이 빠르게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이전까지는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해 교세를 확장하려했던 뮈텔은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일본을 아군으로 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9년, 그들의 달라진 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생긴다.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인 ‘하얼빈 의거’가 일어났을 때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참고 자료 > 1)『뮈텔주교일기』 7권 2) 이기경, 『벽위편(闢衛編)』, 권2, 1785 을사추조적발사건. 3) 김선희,「천주교를 둘러싼 국가 척사론의 논리와 그 이격」, 2025 4) 김진소,『경향잡지』, 1989년 3월호, p. 91,92. 5) 앤서니 그레이엄 티그 譯 「황사영 백서」 6)『순조실록』, 순조 1년(1801년) 11월 5일 7) 위키백과, ‘황사영 백서’ 8) 우리역사넷, ‘황사영백서사건’ 9)『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2월 8일 10) 이기석, 「1901년 제주민란 이야기」, 2011 11) 박찬식, 「1901년 제주민란에 나타난 교폐와 ‘물고자(物故者)’」, 2008 12)『뮈텔주교일기』 3권 13) 김태웅,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 2024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질품서 제34호」, 1901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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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①

세계 종교 탐구 <61> 대한민국의 독립을 방해한 죄, 말뿐인 사과로 충분한가①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는 신문 한 면 크기의 비단에 1만 3천여 글자를 빼곡하게 적어놓은 약 200년 전 조선의 편지 한 장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1801년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중국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로, 비단에 쓴 편지라 하여 이른바 ‘황사영 백서(帛書)’라 불린다.<자료1> 그러나 이 편지는 끝내 중국에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의금부에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무렵, 의금부의 오래된 문서를 파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의 최고 책임자였던 뮈텔 주교가 이를 입수했고, <자료2> 이후 1925년 이 백서를 바티칸에 가져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친다. 이날 교황은 황 알렉시오(황사영의 세례명)의 편지를 읽고는 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며 편지를 제공해 주어 감사하다고 얘기했다.¹⁾ 이 편지에는 무엇이 적혀있었기에 조선 정부에서는 압수를 하고, 조선 천주교는 이를 보존해 로마까지 가져간 것일까? 또 어떤 가치를 높이 사 교황이 감사해하며 오늘날까지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황사영 백서에서 출발해 뮈텔 주교의 행적을 중심으로 매국과 종교적 신념 사이의 경계를 따라가 본다. ▣ 황사영이 제안한 ‘조선 구원책’ 임진왜란의 참화가 조선을 할퀴고 간 직후인 17세기 초, 당시 저술된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이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이미『천주실의(天主實義)』나 『교우론(交友論)』같은 천주교 서적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서적들을 수백 년간 아무도 배우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²⁾ 천주교는 오랫동안 조선 사회에 자리 잡지 못했다. 가톨릭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임진왜란 때가 아닌 18세기 후반으로 이야기한다. 18세기 말, 외국에서 천주교를 접한 이들이 관련 서적을 들여오면서 국내에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유교 문화권인 조선에서, 제사를 금지하며 자기 조상보다 신부(神父)와 교주(敎主)를 더 높이 모시는 천주교는 임금도 부모도 공경하지 않으려 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의 무리라 여겨졌으며, 또한 헛된 것과 영험(靈驗)한 것을 말하며, 귀신(鬼神)을 꾸며 현혹하는 무당(巫堂) 같은 부류,³⁾ ‘통화통색(通貨通色)’, 곧 신앙을 돈으로 매수하고 남녀가 집단 혼음(混淫)하는 패륜아들의 집단으로 인식되었다.⁴⁾ 또한 살기를 즐거워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형벌 보기를 우습게 여기는 점 또한 걱정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했고, 1801년에는 천주교를 믿는 것 자체로 국가의 색출과 처벌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황사영은 그해 조정의 단속을 피해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의 토굴에 숨어 백서를 써내려갔다. 수신인은 중국 베이징교구장 구베아 주교로, 백서의 내용은 자신들이 무고하게 박해받고 있다 주장하면서, ‘천주교 포교를 강제하기 위해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 청하는 얘기였다. 이때 그는 속국으로 만들 자세한 계획과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백서의 원문을 발췌해 하나씩 살펴보면, 황사영은 자신들이 조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를 천주교의 문제가 아니라 극심한 당쟁과 무식한 조선인들의 좁은 견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천주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한데 이를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할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고루하여 조금만 자기와 다른 행위가 있어도 천지간의 큰 변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비유하건대 궁벽한 시골 어린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크게 울 것이니 오늘날 이 나라의 광경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의심과 두려움이 많으며 어리석으면서도 무식하고 성품이 유약하기가 천하에 짝이 없습니다.”⁵⁾ 그리고는 자신들을 거부하는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를 강제하고자,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 여러 방안을 제시했는데,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교황을 통해 중국 황제에게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달라’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어떤 일이든지 중국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중국 황제께 글을 보내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고자 이렇게 청합니다. 중국 황제폐하께서 조선에 특별히 따로 칙령을 내리셔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중국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하게 하십시오.」이와 같이 간청하시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성되고 근실함을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까닭 없이 속국이 되라고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한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이 있은 연후에야 이를 구실 삼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조선 왕이 아직 어려 왕비가 없음을 이용해 중국 황실 여성과 혼인시켜 강제로 결속을 강화시키는 방법 등을 제안했지만, 그중에서도 황사영이 특히 비판받는 대목은 외세의 군사력을 동원해 조선을 협박하고, 선교의 자유를 강제로 받아내려 한 구상이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데다가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군함 수백 척과 군사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글과 사리에 밝은 중국인 선비 서너 명을 대동해 조선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통첩을 보내십시오. 「우리는 서양의 선교하는 배요,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귀국에서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마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 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자료3> 그럼에도 황사영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러한 행위를 조선을 구원하는 일, 선교를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치심에 의거하면, 선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성경에서 타락과 죄악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우리 천주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이 계획은 압도적 군사력을 크게 과시하여 선교를 받아들이게 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온힘을 다하여 도모한다면 어찌 이 손바닥만한 땅을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백서를 중국으로 보내려던 그의 계획은 뜻밖의 변수로 무너졌다. 백서 작성을 함께 논의한 황심(黃沁)이 체포되면서 배론의 은신처가 발각됐고, 토굴을 급습해 황사영을 체포하며 백서도 압수된 것이다. 백서의 계획이 정당하다던 그의 주장과 달리, 체포된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 大逆不道罪)’ 즉, 국가와 군주에 대한 가장 중대한 반역이자 인간과 신하의 도리를 저버리는 극악한 행위로서 처형되었고, 이 사건을 기록한 『순조실록』의 사관은 백서에 대해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었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었다(字字凶肚句句逆腸)’라고 적었다.⁶⁾ 백서 사건 이후, 조선에서 황사영 백서는 ‘흉서(凶書)’로 규정되었고, 이미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했던 조정의 방침은 백서라는 증거를 통해 힘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기존의 사학이라는 인식에 더하여 천주교는 ‘매국(賣國)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고,⁷⁾ 천주교인들은 ‘서양 세력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집단’으로 여겨지게 되었다.⁸⁾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 달리, 천주교에서는 황사영을 ‘순교자’로 기리고 있으며, 백서를 작성했던 배론의 토굴은 ‘성지’로, 그의 묘소는 ‘가톨릭 순례지’로 기념하고 있다.<자료4> 나아가 2013년에는 순교의 공을 높이 사 황사영을 시복 추진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뮈텔 주교는 백서의 가톨릭적 가치를 인정해 보존·번역하여 교황에게 선물했고, 오늘날까지도 바티칸 박물관에 고이 소장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황사영의 판단은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그가 신봉한 종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사영 사건으로부터 65년 뒤, 그가 구상했던 것과 유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외세가 군함과 병력을 앞세워 조선에 선교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다만 그 외세는 중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 병인양요, 제주민란으로 이어지다 1866년 가을, 프랑스 군함이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그해 3월,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처형된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서 금지된 종교였는데,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 몰래 입국해 비밀리에 불법으로 포교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사학을 퍼뜨린 죄로 이들을 처형했고,⁹⁾ 살아남은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사태가 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프랑스는 선교사 처형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강화도를 무력 점령했다. 조선군의 저항에 막혀 결국 철수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와 각종 서적·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 즉 병인년에 서양 세력이 일으킨 소요사태다.<자료5> 병인양요는 선교사들의 무법적인 행태와 서양 세력의 횡포를 조선 사회에 각인시켰고, 이는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밀려오는 제국주의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고, 결국 1876년 일본의 무력 압박으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강제로 문호가 개방된다. 이후 조선은 미국을 시작으로 서양 각국과 차례로 수교했으며,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고종은 병인양요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신부들에게 ‘여아대(如我待)’라는 증표를 주었다. 글자 그대로 ‘나를 대하듯 하라’는 뜻으로, ‘왕이 직접 신분을 보증하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보호패였다.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 각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고, 천주교의 선교 자유도 점차 넓어졌다. 여기에 더해 조선 천주교의 수장 뮈텔 주교는 1895년에 고종을 만나 병인박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받았으며, 1899년에는 조선 정부 관리와 교민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 내 선교의 자유를 더욱 확실히 공인받았다. 그런데 선교의 자유가 확대되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곳곳에서 주민들과의 갈등도 잇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곳은 바로 제주였다. ▣ 제주에서 일어난 천주교의 횡포, 교폐 1901년 제주도에서는 대규모 민중 봉기 ‘제주민란’이 일어난다. ‘신축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이 민란은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폐단에 맞선 민중 항쟁이었다. 당시 제주 민중을 짓누른 것은 ‘세폐(稅弊)’라 불렸던 무거운 세금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특수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가 겹치면서 ‘교회로 인한 폐단’ 이른바 ‘교폐(敎弊)’도 커지고 있었다. 이 두 폐단은 제주민란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데, 더욱 주목할 것은 ‘교폐’라 할 수 있다. 당시 봉세관(세금 징수관)의 무리한 징세는 제주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지역에서도 세폐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교폐까지 겹쳤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보지 못한 커다란 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한 것이었다.¹¹⁾ 그렇다면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교폐는 얼마나 심했던 것일까? 프랑스 신부들이 받은 ‘여아대’ 패는 성당을 치외법권지대로 변모시켰다. 온갖 패악질을 하더라도 성당으로 달아나면 관아에서 체포할 수 없었다. 이 위세를 등에 업은 천주교도들은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천주교 신자인 봉세관 강봉헌과 결탁해 온갖 무리한 세금 징수와 금품 갈취, 토지 갈취에 앞장서는가 하면, 제주도민들이 신성시해온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파괴하고, 교회 책자를 강매하며 입교를 강요했다. 당시의 천주교는 제주도의 풍습과 문화 전체를 ‘사탄’, ‘적’ 또는 ‘마귀’라는 시각으로 보았고 이들은 완전히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뮈텔 주교도 개종 하기 전의 제주도민들을 ‘사탄의 권력 밑에 있던 영혼들’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¹⁰⁾ 이러한 시각들이 토착 문화 말살과 입교 강요를 자행할 수 있었던 종교적·정신적 배경이었다. 또 다른 교폐로는 타인의 무덤 부지를 침범해 멋대로 매장하는 사례, 오래전에 매매하여 시가가 몇 배 오른 토지와 가옥을 과거의 낮은 가격으로 억지로 빼앗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실례로 ‘천주교회에 입교한 홍신규가 교회의 힘에 의지하여 향리 송성은에게서 예전에 내다 판 가옥과 집터를 본래 가격으로 되찾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홍신규 사례뿐만 아니라 교회 세력에 의지해 새로 입교한 교민들이 예전에 불리하게 팔았던 토지를 헐값으로 되찾는 사례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된다. 나아가 토지의 소유권과 경작권을 강제로 탈취해버리는 일도 빈발했는데, 이는 재산을 둘러싼 기존 관행과 법적 처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¹¹⁾ 심지어 강력범죄인 살인과 폭행, 성범죄까지 저질렀지만, 체포는커녕 살해된 시신의 검안조차 하지 못하게 하였고, 사사로이 부녀자를 겁탈해도 아무런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실례로 ‘교인 강기봉이 교인임을 빙자해 여인을 강간하고 아이를 낳게 하는 등 사악한 폐습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천주교인이 이런 죄를 지어 감옥에 잡아들이기라도 하면, 교인 또는 프랑스인이라는 무리들이 찾아와 감옥을 열고 데려갔으며, 관아에 잡아들인 다른 죄인들까지 천주교인이라 주장하며 빼내가는 지경이었다. 천주교 신부들의 정교유착이 이 정도로 심해지자, 일부 주민들은 관아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천주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일반 주민들도 개종하기만 하면 천주교 신부를 등에 업고 특혜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주민들은 간통한 자에게 돈을 징수하던 마을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개종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기선, 오시평, 오치효, 임재득 등 입교 전에 간통 경력이 있는 사람이 천주교민이 된 경우가 다수 확인되었고, 이렇게 간통 등으로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당시 교회는 ‘혼인 생활이 문란한 사람들의 피신처’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다.¹¹⁾ 이처럼 제주에서는 신앙이 아닌 권력의 보호막이 개종의 동기가 되는 기형적인 상황까지 벌어지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한 교폐에 시달린던 제주 민중의 분노는 대규모 봉기 제주민란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의 최고 책임자였던 뮈텔 주교는 이 소식을 듣고 국내·외 온갖 인맥과 권력을 동원해 사태 진압에 나섰다. 그런데 그의 대응에서는 몇 가지 비판점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지나치게 외세 의존적이며 무력적이었다는 점, 교폐는 외면한 채 천주교 신자들의 피해만 부각시킨 점, 폐단 시정 요구는 무시한 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한 점이다.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①

세계 종교 탐구 <38> 홀로코스트의 뿌리를 찾아서-①

세계 종교 탐구 <38>

“하마스를 지구상에서 쓸어버릴 것” “하마스는 사람이 아니다.” “하마스를 완전히 소탕시키겠다.” “하마스는 파괴돼야 한다.” 이는 언론에 표명한 이스라엘 지도부들의 입장이다. 작년 10월 7일 개전한 이래,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본거지가 있는 가자지구에 14만 번 이상 폭격을 가했고, 수많은 하마스 대원들을 사살했다. 문제는 폭격의 피해가 하마스 무장 대원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자지구 대부분이 완전히 파괴되며 인구의 85% 이상이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황이 히틀러에게 비밀 백채널을 제공하다 (*백채널: 비공식 루트)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교황이 히틀러에게 비밀 백채널을 제공하다 (*백채널: 비공식 루트)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 계획을 마무리 짓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는 교황 비오 12세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교황청 주재 독일 대사조차 이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묘했습니다. 이러한 회담의 존재는 비오 12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도록 바티칸이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1981년에 완성된 12권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교황청 문서에는 협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한 지식은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지지하는가?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지지하는가?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이는 10월 7일 하마스가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을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 정권의 관계와 비교하는 12월 10일 자 논평의 제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티칸이 유대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것을 가만히 방관하던 것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나쁘다고 경고합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웹사이트에 게재된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Der Vatikan hat nichts gelernt)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Der Vatikan hat nichts gelernt)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본 코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에서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종교 칼럼과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1. 2023년 12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게재된 칼럼 ‘바티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를 독일어 원문과 함께 실었습니다. 2. 위 칼럼을 인용한 기사와 관련 자료들을 실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번 호『세계 종교 탐구』는 쉽니다. 독자분들의 […]

[우주로 한 걸음] 오타와大 연구팀  “우주의 나이, 138억 년보다 약 2배 많은 267억 년이다”

[우주로 한 걸음] 오타와大 연구팀 “우주의 나이, 138억 년보다 약 2배 많은 267억 년이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관측 데이터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문제가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초기 은하로 알려진 곳에서 거대 은하나 초거대 질량 블랙홀들이 발견되고 있는 점이다. 거대한 은하의 형성과 성장에는 방대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론상 초기 우주에는 작고 어린 은하만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이같은 발견은 ‘작은 은하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큰 은하로 진화해 간다’는 기존 우주론을 뒤엎는 결과로 […]

[우주로 한 걸음] 출처 불명 초고에너지 우주선(cosmic ray) 포착... 현대 물리학으론 설명 불가

[우주로 한 걸음] 출처 불명 초고에너지 우주선(cosmic ray) 포착... 현대 물리학으론 설명 불가

우주는 그 광대함만큼이나 끝없는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것은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최근 우주과학계에는 정설로 받아들이던 이론에 어긋나는 미스터리한 결과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습니다. 작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초기 우주로 알려진 곳에서 존재할 수 없는 거대 은하를 발견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기존 이론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고에너지 우주방사선이 발견되었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우주로 한 걸음』에서는 […]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②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②

◆음란에 대해 종교가 가르친 것 지난 6월, 미국 유타주의 한 교육구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서가에서 성경을 퇴출시켰다.<자료8> 음란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민원을 제기한 학부모는 “성경에는 근친상간, 자위, 수간, 매춘, 강간 등이 기록되어 있다”며, 이는 “학교 도서관과 교실에서 음란물 콘텐츠가 포함된 모든 책을 금지한다”는 유타주의 법안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구약 성경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통 경전이다. […]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①

세계 종교 탐구 <37> 음란에 관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하여-①

세계 종교 탐구 <37>

성욕이란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으로, 종족 보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긴다. 특히 종교에서는 세속보다 더 높은 수준의 금욕과 정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종교인들의 성범죄 소식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서양에 비해 비교적 보수적인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 10년간 종교인 흉악범죄의 90% 이상이 성범죄였으며, 성범죄로 검거된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본 코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에서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종교 칼럼과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1. 9월 18일 뉴스앤타임즈에 게재된 ‘바티칸의 사탄’은 원문과 번역본을 양면으로 실었습니다. 2. 10월 3일 스위스인포에 게재된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는 좌측에 번역본, 우측에는 기사 관련 정보를 실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번 호『세계 […]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바티칸의 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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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본 코너, 해외 종교 칼럼&기사 Review 에서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종교 칼럼과 기사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1. 9월 18일 뉴스앤타임즈에 게재된 ‘바티칸의 사탄’은 원문과 번역본을 양면으로 실었습니다. 2. 10월 3일 스위스인포에 게재된 ‘성학대 피해자들, 유엔과 바티칸에 조치 요구’는 좌측에 번역본, 우측에는 기사 관련 정보를 실었습니다. ※지면 관계상 이번 호『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