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체험기
“삶의 고비마다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삶의 고비마다 지켜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1944년생으로,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영암과 진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광주로 올라온 저는 자취를 하며 계림장로교회에 다녔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뒷집에 사는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그때마다 친구의 외할머니를 뵈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시던 그분은 저를 볼 때마다 “왜 기성교회에 다니냐”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1962년, 제가 자취하던 곳에 어머니가 오셨을 때였습니다. 친구의 외할머니께서 어머니가 오신 것을 아시고 친구 집으로 부르셨고, 그곳에서 어머니는 전도관에서 심방을 나오신 장시춘 관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들려주셨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나눠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생명물을 한 컵 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저에게 천국에 가려면 전도관에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와 어머니는 광주 계림지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향취였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백합꽃 향기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습니다. “엄마, 좋은 냄새가 나요” 하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도 “글쎄 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향취는 예배 시간뿐 아니라 길을 걸을 때도 맡아졌습니다. 신앙촌에 갔을 때나 신축·개축 예배에 참석했을 때도 향취를 맡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나 모임이 있는 곳에는 꼭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당시 광주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집회를 여시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집회 소식이 전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단 안은 2층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뒤쪽에는 아픈 몸으로 들것에 실려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신 하나님께서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 사이를 다니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집회 때 기회가 닿아 몇 차례 안수를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눈 안찰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손가락을 잠깐 대셨을 뿐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무겁고 아픈지 깜짝 놀랐지만, 안찰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시원해졌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목포와 광주 제단에서 배 안찰을 두 번 받기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내가 이런 귀한 은혜를 받았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1969년 결혼한 뒤에는 전남 무안에서 교편생활을 했습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조산 위험이 크니 즉시 입원하지 않으면 산모와 아기가 모두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휴직을 하고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 치료와 안정을 취하면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산 후 충분히 몸조리를 하지 못한 채 다시 교단에 서야만 했습니다.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에는 신우신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큰 병원을 전전하며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왼쪽 옆구리가 칼로 도려내는 듯 심하게 아팠습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고통 속에 살다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침 기장신앙촌에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는데, 그날 하나님께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저도 차례가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신장이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래?” 하시더니 아픈 부위를 손등으로 가볍게 툭 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고 나니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심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후 통증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신장 약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안수나 안찰 소식이 들리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신우신염 앓을 때 약도 소용없었으나 하나님의 손길에 통증이 씻은 듯 사라져 뇌종양 진단받아 수술 날짜까지 잡았지만 수술 없이 건강 되찾아 하나님께 감사드려 생명물로 입관한 아버지 빙그레 미소 짓던 마지막 모습 잊지 못해 그런데 또 한 번의 큰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몸에 이상 증세가 있어 병원을 찾았는데, 처음 찾은 병원에서 뇌종양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전남대병원으로 향했고, 정밀 검사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아 수술 날짜까지 잡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셔서 한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저 역시 주변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았던 터라 두려움이 더욱 컸습니다. 그 후 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매일 약을 복용하고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수술 직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MRI를 다시 찍었는데, 검사를 마친 의사 선생님께서 “약이 아주 잘 들었으니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수술 날짜까지 잡았던 상황에서 더 이상 수술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후 별다른 치료 없이 지내다가 경과를 확인하러 몇 년 만에 다시 전남대병원을 찾았습니다. CT 촬영을 하고 의사 선생님께서 사진을 확인하시더니 아주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병에 대한 걱정 없이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일을 겪고 몇 년이 지나, 1995년에는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 마음이 고우셨던 아버지께서는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집 안에 있는 생명물을 보시고는 “벽장에 놔둬도 여름철에 변하지 않으니 참 신기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에는 주변 제단 관장님들이 찾아오셔서 생명물로 씻겨드린 후 입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입관을 마치고 수의를 입혀 드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도 “교장 선생님께서 웃고 가신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비록 전도관에 다니지 않으셨지만, 마지막 순간 환하게 핀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2000년에는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목포제단 회장 직분을 맡으시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기성교회에 다니는 동생과 장례 절차를 두고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나서서 외할머니가 평생 전도관에서 신앙생활을 해오셨다는 점을 차분히 설명한 덕분에 천부교식 장례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몸이 굳어 팔을 들어 올리면 몸통까지 따라 올라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생명물로 정성껏 씻겨드리자마자 온몸이 노글노글할 정도로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오신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생명물로 모실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시어머니께도 제단에 한 번 나와 보시라고 권했습니다. 새벽마다 법문을 외우시던 분이었지만, 제 권유를 받아들이시고 계림제단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제단에 다니신 뒤로는 “그동안 네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내가 직접 다녀보니 여기가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다”며 고마워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저는 권사님들과 함께 생명물로 닦아드린 후 입관을 해 드렸는데, 예배를 마친 뒤 마주한 시어머니의 얼굴은 생전보다 훨씬 뽀얗게 피어 잠드신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생명물의 권능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지금 제 곁에는 기장신앙촌에서 소비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 큰딸과 가까이에서 저를 돌봐주며 광주제단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신앙촌에 가면 딸이 반겨주어 즐겁고, 집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아들이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이제 제게 남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막내딸도 하나님을 깨닫고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처럼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앙체험기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진 생명물의 은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진 생명물의 은혜

(지난호에 이어) 신앙촌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실 때면,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집무실 앞마당에 물을 받아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3층 창가에서 마당을 향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 집무실 건너편 건물에서 야간 작업을 하며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모두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그때 들었던 축복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합니다. 밤새 이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쉬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밤새 끊이지 않던 하나님의 축복 소리를 들으며 쉬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1974년, 군산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받은 생명물을 챙겨 곧바로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집에 있던 생명물로 이미 깨끗하게 피어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제가 가져간 생명물을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습니다. 다음날 아버지를 석관으로 옮겨 모실 때도 그 위에 생명물을 부어드렸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얼마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꿈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발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깨끗해 보였는데, 제가 얼른 알아보지 못하자 아버지께서는 그 꿈속에서 몇 번이나 발을 보라고 하시며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셨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잘 보이지 않던 반점 몇 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 어머니께 아버지 산소를 한번 살펴봐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알아보니 생전에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던 분이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산소를 찾아와 술을 부으며 하소연을 하고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는 곧바로 산소로 달려가 생명물을 흠뻑 부어 드리고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업무차 하나님 집무실에 갔을 때 아버지 묘소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물통에 물을 담아 오라 하시며 생명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축복받은 생명물을 아버지 묘소에 정성껏 부어 드리고 돌아오며,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1980년대에는 하나님께서 합창을 많이 장려하셨습니다. 덕소와 소사신앙촌 합창단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기장신앙촌으로 내려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합창 경연을 벌이곤 했습니다. 198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기연주회를 준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단원들의 식사와 생활까지 하나하나 살펴 주셨습니다. 연주회 당일 무대 옆에서 순서에 맞춰 단원들의 무대 입장을 돕고, 하나님과 단원들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1990년 2월 하나님께서 낙원으로 가신 뒤, 생명물의 권능이 예전과 같을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무렵 기장 죽성에 사시던 한 분이 사고로 험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명물로 고인을 씻겨 드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낙원에 가신 뒤에도 생명물에 하나님의 신이 변함없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생명물의 권능을 다시 한번 체험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70세에 신앙촌에 입주하셔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양로원에 들어가신 지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저는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생명물로 씻겨 드린 어머니의 모습은 살아 계실 때보다도 몸이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명물의 은혜 가운데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릴 수 있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1994년 저는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촌상회를 개업하기 위해 점포 자리를 찾아다녔는데, 한 달 동안 어디를 가든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곁에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소비조합 활동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을 다해 일할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1999년 2월, 저는 진주 제단으로 첫 교역자 발령을 받았습니다. 소비조합을 거쳐 교역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학창 시절 군산전도관에서 하나님께서 ‘나가서 제단을 살펴보라’고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교역자가 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제게 앞으로 걸어갈 길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임 첫날 밤에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밤새 열기가 가시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그때 체험한 뜨거운 은혜가 불성신의 은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2015년경 천안제단에 처음 부임하던 날, 이미 말라 죽은 커다란 고목이 제단 안쪽을 가로막고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자칫 쓰러지면 아래쪽 주택이나 제단 건물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나무였습니다. 그 후 나무를 없애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워낙 크고 위험해 중장비 기사조차 작업을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제단으로 올라오는 길에 여느 때처럼 그 나무를 올려다보고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아랫집 부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나무 어디 갔어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보니 정말 나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올라와 있던 아랫집 부부를 보며 저도 모르게 “나무 어디 갔어요?” 하고 되묻자, 부부는 “우리가 물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셋이서 함께 화단 쪽을 살펴보니, 거대한 고목은 썩은 뿌리 위에서 꺾여 다른 가지들과 세 갈래로 나란히 겹쳐진 채 이웃집 담과 접시꽃 사이에 누워 있었습니다. 담과의 거리는 불과 10cm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랫집 부부는 “하나님 믿는 교회라 다르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역시 하나님께서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지켜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안제단의 고목이 쓰러졌지만, 이웃집 담과 불과 10cm를 남겨두고 안전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느껴 교역자가 된 뒤에는 신기하게도 입안에 늘 단맛이 느껴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입안에 단물이 고이곤 했는데, 특히 새교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면 그 맛이 더욱 진해졌습니다. 천안에서 시무할 때는 그것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천안제단에는 매주 새교인들이 전도되어 자리가 가득 찼습니다. 새로 오신 분들은 몇 주 동안 예배 시간 내내 생글생글 웃으시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엇이 그렇게 기쁘신지 여쭈어보니, “사진 속에 있는 분이 우릴 보고 웃고 계세요. 제단에 다녀가면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장례가 나면 늘 곁에서 돕기만 하다가, 2025년 6월 축복일 예배를 마치고 서귀포 교인의 장례를 처음으로 직접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밤 12시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언니가 운명하셨다며 동생분이 천부교식 장례를 부탁해 오셨습니다. 생전에 천부교식 장례를 원하셨던 고인의 뜻을 따르겠다는 유가족의 연락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처음으로 직접 주관하는 장례라 긴장이 되었습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저는 입관하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그려보았습니다. 저녁 무렵 서귀포에 도착해 제주 관장님과 교인분들과 함께 입관을 진행했습니다. 신앙촌에서 가져간 생명물을 수건에 적셔 고인의 얼굴을 덮어 드린 뒤 잠시 후 수건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피부가 부드럽게 풀려 뽀얗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고, 곁에 있던 분들도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제주 관장님은 유가족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부드럽게 풀린 고인의 팔을 직접 들어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고인은 한쪽 다리가 ‘ㄱ’ 자로 심하게 굽어 있어 관에 모시기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굽었던 다리가 반듯하게 펴졌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원 직원이 “조금 전에 가져온 그 물로 이렇게 된 겁니까?” 하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장례를 돕던 다른 직원들도 반듯하게 펴진 다리를 보고 “도대체 무슨 물입니까?” 하고 거듭 물었습니다. 제주 관장님은 “신앙촌에서 가져온 생명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물이라 아무리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장례를 직접 주관하면서 생명물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다시금 마음 깊이 느꼈고, 고인을 아름답게 피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서귀포제단에서 처음 장례를 주관하며 생명물로 고인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굽었던 다리가 펴지는 모습을 보고 감사의 기도를 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 일은 장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귀포제단에서 소비조합 일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2년 동안 저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기쁨과 설렘,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저 천국 들어가는 날 주 앞에 가리라”였습니다. 그 가사처럼 하나님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겸손이라 여겼던 행동 속에도 제 고집이 있었고, 게으르게 살아온 순간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도 제 뜻을 앞세워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에도 부족한 저를 교역의 길로 이끌어 주시고, 생명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은혜를 간직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고귀하고 신비로워

오경근 관장(1) / 죽성교회

저는 1939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도이리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장손이셨던 아버님은 제사를 극진히 모시고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보셨으며, 어머님은 종갓집의 살림을 돌보시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시골 농가였던 저희 집은 농사를 크게 짓고 식구들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6.25 전쟁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산나물을 뜯어 와서 반찬으로 […]

처음부터 하나님이셨는데 드러내지 못하셨음을 깨달아

박계윤 권사(3) / 성동교회

전도관에 다니며 기쁘게 생활하던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제가 받은 기쁨과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시누이의 집에 세 들어 사는 대학생 한 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객지 생활 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까이 있는 저희 집에 가끔씩 […]

'방언'이 악신인 것을 처음으로 구분하여 주신 하나님

박계윤 권사(2) / 성동교회

집회에 계속 참석하면서 저는 놀라운 기사이적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설교를 하시며 단상을 탕탕 하고 치실 때면 불덩어리가 번쩍번쩍하고 튀어나오기도 했으며, 때로는 박 장로님의 손끝에서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배 시간에 굵은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며 온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빗방울이 보이지 않고 입은 옷도 전혀 젖지 않아서 ‘어떻게 된 […]

예전엔 죄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떠올라 눈물로 회개

박계윤 권사(1) / 성동교회

저는 1929년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면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외갓집은 당진에 감리교회를 세운 집안으로 그 영향을 받아 저희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저는 아홉 살 때 외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 감리교회에 나간 뒤로 꾸준히 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열여덟 살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을 때 6ㆍ25 전쟁을 맞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부산으로 피난하고 […]

하나님을 뵙고 따라온 시간은 '만 가지 은혜'를 받은 세월

박영희 권사(4) / 소사신앙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71년, 어머님이 운명하시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어머님이 큰오빠와 저를 부르시더니 큰오빠에게 하시는 말씀이 “애비야, 내가 마지막 부탁이 있다. 막내가 그러는데 전도관에서는 시신을 생수로 씻어서 매듭을 묶지 않고 편안하게 입관한다는구나. 나도 꼭 전도관식으로 해 다오.”라고 하셨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계신 어머니는 전도관식으로 입관할 것을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대대로 염을 하여 장례를 치러 온 저희 집안에서 전도관식으로 […]

뻣뻣하게 굳어진 시신도 생명물을 바르면 아름답게 피어나

박영희 권사(3) / 소사신앙촌

그 후 어느 날인가 하나님께서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하실 때였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두고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모략중상하는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중에 내가 손을 씻은 물이나 발을 씻은 물을 먹은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내가 이 많은 교인들한테 손 씻은 물하고 발 […]

꿈에 축복해 주시며 '이제 됐어'하시자 병이 나아

박영희 권사(2) / 소사신앙촌

그런데 눈을 감고 기도할 때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방 안에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방문이 닫혀 있고 아까 열어 놨던 창문도 닫아 놓아서 바람이 들어올 곳이 전혀 없는데, 휘몰아치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그 지독하던 송장 냄새가 싹 걷히는 것이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다른 분들은 “성신의 바람이 부네요.”라고 […]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강한 향취가 진동해 놀라

박영희 권사(1) / 소사신앙촌

저는 1932년 경기도 양평에서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농가였던 저희 집은 아버님이 농사를 크게 지으시며 소를 사고파는 사업을 하셔서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서울에 있는 작은오빠 집에서 지내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후 6.25 전쟁 중에 부모님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으며 스물한 살에 결혼하여 부전동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 시어머님은 재건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으로 […]

저를 불러 구원의 길을 걷게 하신 그 사랑 생각하니 가슴 메어

박정순 권사(3) / 덕소신앙촌

제 차례가 되어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자마자 몹시 아픈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를 빼야 되지요.” 하고 말씀하셔서 저는 ‘내 속의 죄가 빠져야 되는구나.’ 하며 통증을 겨우겨우 참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딸아이의 머리에도 손을 얹으시며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주 향기롭고 좋은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또한 온몸이 말할 수 없이 가볍고 상쾌하여 […]

하나님께서 설교하시는데 활활 타는 불덩어리가 튀어나와

박정순 권사(2) / 덕소신앙촌

그 후 군인인 오빠가 광주에 있는 부대로 발령받게 되면서 저희 가족은 광주 근처의 일곡으로 이사했습니다. 하루는 광주 시내에서 벽보를 봤는데 조선대학교 아래의 ‘광주전도관’이라는 곳에 박태선 장로님이 오셔서 집회를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대하던 박 장로님의 집회 소식을 알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집회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집회가 열리는 날 광주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광주전도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