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묻다] 종교는 왜 언어를 바꾸려 하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관료들이 사용한 ‘언어 규칙’에 주목했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 ‘학살’은 ‘최종 해결’이나 ‘특별 취급’으로, ‘강제 추방’은 ‘재정착’이나 ‘동부 노동 투입’으로 표현됐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말 바꾸기가 아니었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꿈으로써 사람들이 그 행위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방식까지 바꾸려 했다는 점이었다. 2024년 11월,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 페르난데스 추기경은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에 관한 서한을 발표했다. ‘거짓 신비주의’는 원래 거짓 발현·환시·초자연적 메시지 등을 다룰 때 등장한 개념이었으나, 학대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이에 페르난데스는 종교적 권위나 영적 체험을 이용해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를 ‘거짓 신비주의’ 대신 ‘영적 학대’라는 별도의 범죄로 규정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마르코 루프니크 신부 사건은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가 어떻게 범죄와 맞물리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루프니크는 바티칸과 루르드·파티마 등 주요 성지에 작품을 남긴 종교예술가이자 교황청에서도 인정받던 고위급 사제였다. 그는 영적 지도자라는 권위를 이용해 여러 수녀에게 심리적·성적 학대를 가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루프니크는 성적 접촉을 시도하며 “주님의 입맞춤”,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한 것”이라 했고, 심지어 다른 수녀까지 성관계에 끌어들여 “삼위일체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영적 학대’를 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가 신에게 받은 특별한 권위나 영적 체험을 내세워 사람을 복종시켰다면, 학대뿐 아니라 그 신적 권위가 진짜인지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신적 권위의 거짓을 구분하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진짜가 있어야 그것을 기준으로 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역사적,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짜 신비를 갖고 있을까? 과학적 분석과 역사 비평, 데이터 검증이 고도화된 오늘날에는 수천 년간 종교가 주장해 온 신비들이 하나씩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성체의 기적,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 발현, 성인들의 환시, 그리고 기독교의 근간인 예수의 부활까지 초월적 권능의 개입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제시된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 신비주의’라는 잣대를 엄격하고 일관되게 들이댄다면, 그 칼날은 결국 교회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 신비의 진위를 판별하려는 순간, 교회 역시 자신들이 주장해온 신비를 같은 기준으로 검증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학대는 이 곤란한 입증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우회로가 된다. 질문의 초점이 ‘신비가 진짜인가’에서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가’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신비의 진위나 신의 실제 개입 여부를 증명할 필요 없이, 인간적인 권력 남용과 심리적 지배라는 세속적·윤리적 영역에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범죄는 영적 권위를 주장하며 종교를 악용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고, 교회가 독점해 온 거대한 교리 체계는 아무런 손상 없이 그대로 신성한 영역에 남겨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영혼을 인도하는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고, 성모 발현과 성체 기적 같은 초자연적 신비를 가르쳐왔다. 이러한 권위가 학대에 이용됐다면 학대만 처벌할 것이 아니라, 그 권위와 신비의 진위까지 함께 검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결국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는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과만 처벌하고 그 근거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은, 썩은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줄기만 잘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레오 14세는 올해 1월 각국 외교사절단 앞에서 언어가 상대를 속이고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며 ‘언어의 타락’을 경고했다. 그렇다면 그 경고는 가톨릭의 언어 규칙에도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신의 임재를 보여주기 어려워지자 심리적 안정과 삶의 태도를 ‘영성’이라 불렀고, 초자연적 증거도 없이 교회를 ‘지각 가능한 신비’라고 선언했다. 과거 교황들이 노예제를 허용했던 문제는 ‘시대적 한계’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거짓 신비주의’에서 ‘영적 학대’로 세간의 시선을 옮기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언어 규칙을 평범한 말로 옮기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다른 이름을 붙여 그 의미를 흐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수많은 종교 언어 역시 진짜 신비를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을 흐리기 위해 고안된 거짓말은 아니었을까. 만약 종교가 나치와 달리 자신들의 언어 규칙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그 모든 주장의 출발점인 신비(神秘), 곧 신의 실재를 보여주면 된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교회 안에서 역사한다면, 거짓을 가려낼 근거 역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재는 끝내 보여주지 못한 채,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새로운 언어와 해석으로 책임의 방향만 바꾸고 있다면 마지막 질문만이 남는다. 종교가 끊임없이 언어를 바꾸는 이유는, 결국 신의 부재(不在)를 가리기 위해서인가.

시온춘추

[진리를 묻다]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인가?

“인공지능을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를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려 덧없고, 겉모습뿐이고, 기만적인 것들이 진정한 가치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다.” 교황 레오 14세가 지난 7월 브라질 기독교 축제에 보낸 영상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취임 이후 AI가 인간을 지배하고 현실 인식을 훼손할 수 있다며 거듭 경고해 왔다. 혁신적인 기술로 인간의 지식과 정보 접근성을 확장하고 있는 AI를 교황은 왜 이토록 경계하는 것일까. 올해 1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온 성서비평 연구자 줄리언 도일은 AI를 활용해 성경의 부활 서술과 역사 기록을 대조한 끝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가 주목받은 이유는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창한 믿음 신학의 출발점도 예수의 부활에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17절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는 구절은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구원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AI가 부활의 진위를 정면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물론 AI가 최초로 부활의 진위를 밝혀낸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많은 학자들이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을 기록한 동시대의 객관적인 1차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 예수를 처형한 것으로 전해지는 빌라도의 동시대 공식 문서 가운데서도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해왔다. 달라진 것은 과거 일부 연구자와 전문가에게 집중돼 있던 사료와 비판적 논의에 대중이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누구나 방대한 지식과 데이터를 토대로 질문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머물렀던 부활의 실증적 근거 역시 검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이지, 부활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부활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의문을 품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해왔다. 수천 년간 반복된 종교적 주입은 부활에 대한 합리적 의심마저 터부시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의심하는 순간 자신의 신앙과 종교적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지탱해 온 ‘맹목적 믿음’의 사회적·심리적 위력이다.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가짜나 복제품이 아니다. 일반적인 복제품에는 그것이 모방하는 원본이 존재하지만, 시뮬라크르는 반복된 이미지와 기호가 원본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이다. 허상이 실재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실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신조차 시뮬라크르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이어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신의 사실상 소멸과 세속적이고 극적인 방식의 의식 조작 위에 자신들의 전략을 세웠다”고 덧붙였다.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을 나타내는 상징과 의례가 오히려 실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종교적 구조에 강력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원래라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먼저 증명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과 교리가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다.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 부활을 기념하는 의례와 행사, 거대한 십자가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1988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서 중세의 위조품으로 판정된 뒤에도 계속해서 신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토리노 수의는 기독교 시뮬라크르의 전형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놓여 있던 종교적 주장도 이제는 더 이상 검증과 무관한 영역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은 AI가 인간을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AI는 방대한 데이터와 분석 능력으로 진실 바깥에 있던 종교적 주장들을 다시 검증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발전된 과학 기술을 통해 수천 년 동안 기독교가 진리라고 가르쳐온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역시 자신들이 구축해 온 세계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의 실재를 입증하지 못하면서도 그 이름으로 행사해 온 권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수천 년간 인류를 비현실의 세계에 가둔 채, 덧없고 겉모습뿐이며 기만적인 것들을 진리로 믿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시온포럼

AI는 위험한가?

AI는 위험한가?

AI 속도조절론 뒤에 숨은 기업들의 투자 부담과 이해관계 차세대 기술 선점과 독자적인 가치사슬 구축이 한국의 과제 AI는 이미 전쟁의 무기가 되고 있다. 휴머노이드와 사족보행 로봇이 우크라이나 전선 등에서 정찰 및 감시를 목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AI를 탑재한 자폭 드론과 요격 드론이 실전에 대량 활용되고 있고, 공격 대상을 식별하는 등 작전 참모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27년 10월 미국 국방부는 AI 로봇과 드론을 활용한 무기체계 도입을 전담하는 자율전 사령부(AutoWarCom)를 창설할 계획이다. 중국 인민해방군도 휴머노이드 로봇 병사를 실전에 투입하기 위한 연구와 실증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장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도 AI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2026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로봇 올림픽(Robot Olympics)에서 로봇들이 인간의 육상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유니트리의 ‘슈퍼맨’은 100m 달리기에서 우사인 볼트의 기록 9.58초를 경신한 9.39초를 기록했다. 한편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간의 격투 경기(REK)에서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가진 휴머노이드 로봇이 왼발 앞차기 공격으로 인간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KO로 경기가 중단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인류가 개발한 AI가 오히려 위협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AI 속도조절론(AI Slowdown)’이다. AI도 속도 조절이 가능한가? 첫째, AI의 개발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모든 AI 기업이 다 같이 속도 조절에 임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상황에서는 더욱 치열하게 기술 격차를 벌리기 위해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속도 조절에 임했던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경제학의 게임이론(Game Theory)이나 국제정치학의 지정학적 현실론(Geopolitical Realism) 등이 AI 속도조절론은 이상일 뿐임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둘째, AI 속도조절론은 대외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한다. 엔트로픽 CEO 아모데이, 오픈AI CEO 올트먼, 스페이스X CEO 머스크 모두 자금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하다. 잉여현금흐름(FCF)이 바닥나고, 국채금리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회사채 발행도 녹록지가 않다. 막대한 규모의 자본지출(CapEx)을 단행하기에 한계에 다다른 것이 속내이고, 속도조절론은 이런 기업들의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나, 저커버그 메타 CEO 등 자금 사정이 여유 있거나 비즈니스적으로 속도 조절에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은 속도조절론에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AI의 속도는 조절하지 못할지라도, 방향은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도 기술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사례가 있다. 1990년대 양 돌리 복제 성공 이후 인간 복제 연구를 금지하는 강력한 법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바 있다. 화학무기금지조약(CWC) 및 NPT(핵부확산조약)를 통해 위험 기술의 무분별한 확산을 상당 부분 제어한 사례도 있다.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CFCs)를 금지하기도 했다. 1700년대 세상에 도입된 바퀴처럼, 1800년대 전기가 도입되고, 1900년대 인터넷이 전산업에 걸쳐 활용되었던 것처럼, 2000년대는 AI가 세상을 뒤집어 놓는 물결이다. AI 속도조절론이 부상한 것은 경쟁력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의 옥석 가리기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국은 AI 벨류체인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분야를 모니터링하고, 차세대 기술을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세계열강들이 한국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자 경쟁적으로 제안하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시온논단

신앙신보 창간 70년을 맞이하며

2025년 2월 7일, 신앙신보가 진실의 전파자로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70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과 체험담, 그리고 교단의 소식을 전하는 데 집중해 온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참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신보를 통해 참된 길을 찾고 천부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보람과 책임감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천부교 초창기에는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안찰을 받고 은혜를 체험했으나, 이후에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천부교를 중상모략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기성 교단과 일부 언론은 천부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장하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역사와 신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때 박수를 치며 예배드리는 천부교의 예배 방식을 비난하던 기성교회도 지금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최고로 가치있는 생명물에 대해서 불신과 비난을 이어왔지만, 신앙촌의 생명물은 여전히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며, 시신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널리 알리는 사명을 다하며 진리를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어 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사랑으로 신앙신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참된 신앙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편집자 주

다양한 독자층이 찾는 신문

2374호 신앙신보를 읽고

소비조합원에게 유익한 기사 많아 다양한 독자들 읽을만한 내용도 소비조합을 하다 보니 신앙촌상회 소식을 가장 먼저 보게 됩니다. 특히 신앙촌상회가 어디 어디서 오픈되었다는 기사를 보면 제가 오픈한 것처럼 기쁩니다. 또 신문에 소개되는 소비조합원들의 인터뷰나 런의 메아리도 소비조합 활동에 매우 유익합니다. 앞으로 소비조합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층의 독자들이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신앙신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명자 […]

제주 해군기지와 사제단의 일탈

제성호 / 중앙대 법과대학 교수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에 일부 신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신적 대부 격인 문규현 신부는 친형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일단의 사제단과 함께 강정마을과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업 중단투쟁을 위해 문 신부는 이곳으로 아예 주소지를 옮긴 바 있고, “끝까지 주민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기지 건설 무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는 […]

사제(司第)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현장에도 예의 ‘낯익은’ 훼방꾼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들이 국민 앞에 낯이 익은 것은 이미 미국산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 평택 미군기지 건설 반대 등에도 얼굴을 드러냈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멤버였기 때문이다. 해군은 2014년까지 제주도 강정마을이란 곳에 함정이 정박하는 군항 부두와 크루즈 선박을 계류할 수 있는 민간 크루즈항 부두 등으로 구성된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

유익한 건강칼럼

2373호 신앙신보를 읽고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란 말도 있듯이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 일도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7면에 실리는 건강칼럼을 잘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건강문제를 다루어 주어서 자칫 지나칠 수 있는 몸의 변화를 스스로 관찰해 볼 수 있는 것 같아 무척 유익합니다. 건강칼럼에 바라는 점은 좀더 자세히 그리고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

미래를 이끌 젊은이들 모임

2372호 신앙신보를 읽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는 모임 자주 있기를 1면에 실린 전국 여청 여대생 세미나 기사를 보고 앞으로 천부교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새기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회가 된 것 같아 참 기쁘고 흐뭇했습니다. 하나님 사업을 통해 전도하는 소비조합은 물론 주일학생부터 대학생 여청들을 위한 다양한 모임이 생겨서 더욱 전도가 많이 되었으면 […]

집중 호우와 산사태 대비책

김민식 / 사방협회 실장, 농학박사

지난 7월27일 내린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서울시 서초구 우면산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사태 발생에 따른 토석류 피해가 발생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27일 오전 0시부터 23시까지 서초구 392㎜, 강남구 296㎜, 관악구 260㎜ 등 물폭탄이 쏟아졌다. 산사태(山沙汰)란, 지진이나 강우에 의해 산지사면의 토괴(흙덩이)가 응집력을 잃어 일부 또는 전체가 급속히 무너져 내리는 현상을 총칭하며, 인간생활권에 큰 피해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산지 […]

홍수 리스크

올 여름의 장마는 정말 대단했다. 제일 많이 내린 날 서울에는 392㎜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기상 관측 자료에 의하면 1920년에도 하루 354㎜까지 내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추세인데 신문에 발표된 모 기상학자의 자료에 의하면 하루 100㎜ 이상 호우(豪雨)가 내린 것이 1980년대에는 583회였다가 1990년대에 642회, 2000년대 들어와서는 687회로 늘었고, 서울의 여름 강수량은 800㎜(1980년대)→894㎜(1990년대)→981㎜(2000년대)로 10년마다 90㎜씩 […]

따뜻한 자본주의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따뜻한 자본주의’를 제창했다. ‘따뜻한 자본주의’는 멋있는 말이긴 하나, 혹시 형용모순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라고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사회의 이미지가 크다. 그러기에 1등만 기억할 뿐 2등은 기억하지 못하는 매정한 사회다. 2등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3등, 4등…, 항차 꼴찌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따뜻하다고 하다니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면 21세기 한국형 자본주의라면 다른 […]

온정적 시장 경제

끊임없이 부를 재창조해 준다고 굳게 믿어왔던 미국식 시장경제 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세계의 경제 위기를 자초하고 국가 신용이 강등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면 가장 훌륭한 복지 모델로서 선망의 대상이 돼 왔던 유럽식 분배 모델이 국가부도 위기로 내몰리게 됨으로써 바야흐로 어떻게 하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인의 초미의 관심사가 돼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이 앞으로의 […]

소비조합원 사례발표

2371호 신앙신보를 읽고

저는 신앙촌 소비조합원들의 판매노하우에 대한 기사를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매달 소비조합세미나에서 했던 감동적인 소비조합원들의 사례발표를 요약해서 정리를 해주는데, 경험이 부족한 소비조합원들에게 판매노하우 뿐만 아니라 고객관리, 고객을 대하는 마음자세 등을 배우고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까지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김경순 권사/소사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