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묻다] 종교는 왜 언어를 바꾸려 하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관료들이 사용한 ‘언어 규칙’에 주목했다. 나치의 공식 문서에서 ‘학살’은 ‘최종 해결’이나 ‘특별 취급’으로, ‘강제 추방’은 ‘재정착’이나 ‘동부 노동 투입’으로 표현됐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단순한 말 바꾸기가 아니었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꿈으로써 사람들이 그 행위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방식까지 바꾸려 했다는 점이었다. 2024년 11월,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 페르난데스 추기경은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에 관한 서한을 발표했다. ‘거짓 신비주의’는 원래 거짓 발현·환시·초자연적 메시지 등을 다룰 때 등장한 개념이었으나, 학대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이에 페르난데스는 종교적 권위나 영적 체험을 이용해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를 ‘거짓 신비주의’ 대신 ‘영적 학대’라는 별도의 범죄로 규정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마르코 루프니크 신부 사건은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가 어떻게 범죄와 맞물리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루프니크는 바티칸과 루르드·파티마 등 주요 성지에 작품을 남긴 종교예술가이자 교황청에서도 인정받던 고위급 사제였다. 그는 영적 지도자라는 권위를 이용해 여러 수녀에게 심리적·성적 학대를 가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루프니크는 성적 접촉을 시도하며 “주님의 입맞춤”,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한 것”이라 했고, 심지어 다른 수녀까지 성관계에 끌어들여 “삼위일체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영적 학대’를 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가 신에게 받은 특별한 권위나 영적 체험을 내세워 사람을 복종시켰다면, 학대뿐 아니라 그 신적 권위가 진짜인지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신적 권위의 거짓을 구분하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진짜가 있어야 그것을 기준으로 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역사적,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짜 신비를 갖고 있을까? 과학적 분석과 역사 비평, 데이터 검증이 고도화된 오늘날에는 수천 년간 종교가 주장해 온 신비들이 하나씩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성체의 기적,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 발현, 성인들의 환시, 그리고 기독교의 근간인 예수의 부활까지 초월적 권능의 개입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제시된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 신비주의’라는 잣대를 엄격하고 일관되게 들이댄다면, 그 칼날은 결국 교회 자신을 향할 수밖에 없다. 신비의 진위를 판별하려는 순간, 교회 역시 자신들이 주장해온 신비를 같은 기준으로 검증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학대는 이 곤란한 입증 책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우회로가 된다. 질문의 초점이 ‘신비가 진짜인가’에서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가’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신비의 진위나 신의 실제 개입 여부를 증명할 필요 없이, 인간적인 권력 남용과 심리적 지배라는 세속적·윤리적 영역에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범죄는 영적 권위를 주장하며 종교를 악용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고, 교회가 독점해 온 거대한 교리 체계는 아무런 손상 없이 그대로 신성한 영역에 남겨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사제에게 영혼을 인도하는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고, 성모 발현과 성체 기적 같은 초자연적 신비를 가르쳐왔다. 이러한 권위가 학대에 이용됐다면 학대만 처벌할 것이 아니라, 그 권위와 신비의 진위까지 함께 검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결국 ‘거짓 신비주의’와 ‘영적 학대’는 분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과만 처벌하고 그 근거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은, 썩은 뿌리는 그대로 둔 채 줄기만 잘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레오 14세는 올해 1월 각국 외교사절단 앞에서 언어가 상대를 속이고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며 ‘언어의 타락’을 경고했다. 그렇다면 그 경고는 가톨릭의 언어 규칙에도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신의 임재를 보여주기 어려워지자 심리적 안정과 삶의 태도를 ‘영성’이라 불렀고, 초자연적 증거도 없이 교회를 ‘지각 가능한 신비’라고 선언했다. 과거 교황들이 노예제를 허용했던 문제는 ‘시대적 한계’로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거짓 신비주의’에서 ‘영적 학대’로 세간의 시선을 옮기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언어 규칙을 평범한 말로 옮기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다른 이름을 붙여 그 의미를 흐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수천 년간 발전시켜 온 수많은 종교 언어 역시 진짜 신비를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을 흐리기 위해 고안된 거짓말은 아니었을까. 만약 종교가 나치와 달리 자신들의 언어 규칙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그 모든 주장의 출발점인 신비(神秘), 곧 신의 실재를 보여주면 된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교회 안에서 역사한다면, 거짓을 가려낼 근거 역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재는 끝내 보여주지 못한 채,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새로운 언어와 해석으로 책임의 방향만 바꾸고 있다면 마지막 질문만이 남는다. 종교가 끊임없이 언어를 바꾸는 이유는, 결국 신의 부재(不在)를 가리기 위해서인가.

시온춘추

[진리를 묻다]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누구인가?

“인공지능을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를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려 덧없고, 겉모습뿐이고, 기만적인 것들이 진정한 가치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다.” 교황 레오 14세가 지난 7월 브라질 기독교 축제에 보낸 영상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취임 이후 AI가 인간을 지배하고 현실 인식을 훼손할 수 있다며 거듭 경고해 왔다. 혁신적인 기술로 인간의 지식과 정보 접근성을 확장하고 있는 AI를 교황은 왜 이토록 경계하는 것일까. 올해 1월, 초기 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온 성서비평 연구자 줄리언 도일은 AI를 활용해 성경의 부활 서술과 역사 기록을 대조한 끝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이 결과가 주목받은 이유는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창한 믿음 신학의 출발점도 예수의 부활에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17절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는 구절은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구원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AI가 부활의 진위를 정면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물론 AI가 최초로 부활의 진위를 밝혀낸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많은 학자들이 예수가 부활하는 장면을 기록한 동시대의 객관적인 1차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 예수를 처형한 것으로 전해지는 빌라도의 동시대 공식 문서 가운데서도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해왔다. 달라진 것은 과거 일부 연구자와 전문가에게 집중돼 있던 사료와 비판적 논의에 대중이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누구나 방대한 지식과 데이터를 토대로 질문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머물렀던 부활의 실증적 근거 역시 검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이지, 부활 자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부활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의문을 품는 행위 자체를 죄악시해왔다. 수천 년간 반복된 종교적 주입은 부활에 대한 합리적 의심마저 터부시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의심하는 순간 자신의 신앙과 종교적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지탱해 온 ‘맹목적 믿음’의 사회적·심리적 위력이다.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한 가짜나 복제품이 아니다. 일반적인 복제품에는 그것이 모방하는 원본이 존재하지만, 시뮬라크르는 반복된 이미지와 기호가 원본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이다. 허상이 실재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실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신조차 시뮬라크르였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이어 “이것이 바로 예수회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신의 사실상 소멸과 세속적이고 극적인 방식의 의식 조작 위에 자신들의 전략을 세웠다”고 덧붙였다.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을 나타내는 상징과 의례가 오히려 실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종교적 구조에 강력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원래라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먼저 증명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과 교리가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다.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 부활을 기념하는 의례와 행사, 거대한 십자가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1988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서 중세의 위조품으로 판정된 뒤에도 계속해서 신앙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토리노 수의는 기독교 시뮬라크르의 전형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믿음의 영역에 놓여 있던 종교적 주장도 이제는 더 이상 검증과 무관한 영역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교황은 AI가 인간을 비현실적인 세계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AI는 방대한 데이터와 분석 능력으로 진실 바깥에 있던 종교적 주장들을 다시 검증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발전된 과학 기술을 통해 수천 년 동안 기독교가 진리라고 가르쳐온 것들에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역시 자신들이 구축해 온 세계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의 실재를 입증하지 못하면서도 그 이름으로 행사해 온 권위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수천 년간 인류를 비현실의 세계에 가둔 채, 덧없고 겉모습뿐이며 기만적인 것들을 진리로 믿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시온포럼

AI는 위험한가?

AI는 위험한가?

AI 속도조절론 뒤에 숨은 기업들의 투자 부담과 이해관계 차세대 기술 선점과 독자적인 가치사슬 구축이 한국의 과제 AI는 이미 전쟁의 무기가 되고 있다. 휴머노이드와 사족보행 로봇이 우크라이나 전선 등에서 정찰 및 감시를 목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AI를 탑재한 자폭 드론과 요격 드론이 실전에 대량 활용되고 있고, 공격 대상을 식별하는 등 작전 참모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27년 10월 미국 국방부는 AI 로봇과 드론을 활용한 무기체계 도입을 전담하는 자율전 사령부(AutoWarCom)를 창설할 계획이다. 중국 인민해방군도 휴머노이드 로봇 병사를 실전에 투입하기 위한 연구와 실증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장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도 AI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2026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로봇 올림픽(Robot Olympics)에서 로봇들이 인간의 육상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유니트리의 ‘슈퍼맨’은 100m 달리기에서 우사인 볼트의 기록 9.58초를 경신한 9.39초를 기록했다. 한편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간의 격투 경기(REK)에서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가진 휴머노이드 로봇이 왼발 앞차기 공격으로 인간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KO로 경기가 중단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인류가 개발한 AI가 오히려 위협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AI 속도조절론(AI Slowdown)’이다. AI도 속도 조절이 가능한가? 첫째, AI의 개발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모든 AI 기업이 다 같이 속도 조절에 임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상황에서는 더욱 치열하게 기술 격차를 벌리기 위해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속도 조절에 임했던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경제학의 게임이론(Game Theory)이나 국제정치학의 지정학적 현실론(Geopolitical Realism) 등이 AI 속도조절론은 이상일 뿐임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둘째, AI 속도조절론은 대외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한다. 엔트로픽 CEO 아모데이, 오픈AI CEO 올트먼, 스페이스X CEO 머스크 모두 자금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하다. 잉여현금흐름(FCF)이 바닥나고, 국채금리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회사채 발행도 녹록지가 않다. 막대한 규모의 자본지출(CapEx)을 단행하기에 한계에 다다른 것이 속내이고, 속도조절론은 이런 기업들의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나, 저커버그 메타 CEO 등 자금 사정이 여유 있거나 비즈니스적으로 속도 조절에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은 속도조절론에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AI의 속도는 조절하지 못할지라도, 방향은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도 기술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사례가 있다. 1990년대 양 돌리 복제 성공 이후 인간 복제 연구를 금지하는 강력한 법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진 바 있다. 화학무기금지조약(CWC) 및 NPT(핵부확산조약)를 통해 위험 기술의 무분별한 확산을 상당 부분 제어한 사례도 있다. 몬트리올 의정서를 통해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CFCs)를 금지하기도 했다. 1700년대 세상에 도입된 바퀴처럼, 1800년대 전기가 도입되고, 1900년대 인터넷이 전산업에 걸쳐 활용되었던 것처럼, 2000년대는 AI가 세상을 뒤집어 놓는 물결이다. AI 속도조절론이 부상한 것은 경쟁력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 간의 옥석 가리기가 전개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국은 AI 벨류체인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분야를 모니터링하고, 차세대 기술을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세계열강들이 한국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자 경쟁적으로 제안하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시온논단

신앙신보 창간 70년을 맞이하며

2025년 2월 7일, 신앙신보가 진실의 전파자로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70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과 체험담, 그리고 교단의 소식을 전하는 데 집중해 온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에게 참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신보를 통해 참된 길을 찾고 천부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보람과 책임감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천부교 초창기에는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안찰을 받고 은혜를 체험했으나, 이후에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천부교를 중상모략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또한, 기성 교단과 일부 언론은 천부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장하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역사와 신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때 박수를 치며 예배드리는 천부교의 예배 방식을 비난하던 기성교회도 지금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최고로 가치있는 생명물에 대해서 불신과 비난을 이어왔지만, 신앙촌의 생명물은 여전히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며, 시신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신보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널리 알리는 사명을 다하며 진리를 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어 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사랑으로 신앙신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참된 신앙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편집자 주

통일대박'으로 가는 길

송대성/세종연구소장

통일대박이란 남북분단구조 속에 갈등 및 분쟁으로 인해 부질없는 자산 및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상황이 남북한 통일로 인해 진정한 국가발전 및 국제적 경쟁력 제고에 몰두할 수 있는 대박의 상황이 됨을 한마디로 축약한 멋진 표현이다. 통일대박은 통일이 된다고 하여 무조건 대박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쁜 통일’이 아닌 ‘좋은 통일’인 경우만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다. 그저 대박의 환상에만 젖어 […]

화려한 빈곤

한국 천주교에 추기경이 또 한명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주교 사제들은 유달리 복장과 장신구가 요란하다. 사제부터 교황까지 신분에 따라 입는 복장이 다르고 쓰는 모자의 색깔까지 다르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입는 수단이라고 하는 발목까지 길게 늘어지는 옷은 사제는 검은색, 주교와 대주교는 자주색, 추기경은 진홍색, 교황은 백색이다. 검은색은 세속에서 하나님께 바친 삶을 뜻한다는 것이고 추기경의 진홍색은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한다는 […]

2014 임원 발대식 기사를 보며

2449호 신앙신보를 읽고

1면에 실린 2014년 임원 발대식 사진과 기사를 보면서 저 또한 부족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올 한 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올해가 최고의 노력하는 한 해가 될 것을 다짐하고 앞서 뛰시는 분들처럼 저도 열심히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 싶습니다. 박순예 권사/양산교회

레이건과 대처의 리더십

장병옥/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소신과 신념의 지도자였던 레이건은 일생을 통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어떤 반대가 있다할지라도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자신의 결정이 국민의 다수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손해와 희생을 감수할지라도 과감하게 실행했다. 1981년 8월, 미국 공항 관제사들이 근무단축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연방법에 의하면 국가 안보와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공항 관제사들은 파업을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

살인 한파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지만 이번에 미국에 닥친 살인한파는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체감기온이 영하 70도까지 곤두박질 칠 정도의 한파가 몰아닥친 것이다. 영하 10~20도만 돼도 춥다고 하는데 영하 70도라면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 미국 국립기상청은 약 2억 명이 한파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수 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 추위로 당장 항공기 […]

전국 대학생, 여청 신년 콘서트 기사를 읽고

2448호 신앙신보를 읽고

대학생, 여청 신년 콘서트 기사를 읽고, 여청들의 특순사진을 보니 무척이나 예뻐보이고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기사를 읽는 내내 전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앞서나온 하나님의 가지로서 여성회파트에서도 젊은사람들을 보다 많이 전도해서 이런 모임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순옥 권사/전농교회

믿고찾는 신앙촌 간장 기사를 읽고

2447호 신앙신보를 읽고

소비조합으로서 아무래도 신앙촌 식품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자주 읽게 됩니다. 우리 신앙촌식품이 워낙에 맛깔나게 나오기도 하지만 신앙촌 식품의 우수함을 알고 손님상이나 아이들 급식에 내놓는 요리사와 영양교사들을 볼 때면 뿌듯하고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저도 식품홍보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끼게 됩니다. 유선임 권사/동래교회

소통 정치를 위한 기본 전제들

김동규/고려대 북한학과 명예교수

흔히들 박근혜정부를 상생정치와는 거리가 먼 불통과 독단의 정치라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국가는 로마시대와 같은 직접민주의적 정치형태가 불가능하여 대의정치로 발전되고 있다. 민주주의 헌법정신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며 발전법칙은 법치주의이고 모든 문제는 법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문제는 수천만에 달하는 국민들 개개인의 욕구와 다양한 가치관은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는데 있다. 개인과 개인, 가족 간, 사회집단 간, 국가 간에 상호이해갈등으로 항상 […]

신년사의 의미

2014년 새해를 앞두고 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 등 각 종교 지도자들이 신년사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요즘 종교의 현주소를 알 수가 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통일과 세계평화를 앞당기자.”(조계종 종정), “이웃과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누구나 행복해진다.”(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사랑과 용서는 모든 종교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다. 그러나 증오와 분열의 사회적 현실을 극복하는데 종교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말을 […]

정의구현사제단의 위선

박효종 / 서울대 윤리학과 초빙교수

요즈음 천주교의 일부 성직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떠오르는 화두가 있다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신의 것은 신에게 바치라”는 바이블의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유데아 지역이 로마에 의해 정복되어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이민족의 통치에 분개했고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하며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당연히 로마에 세금을 내는 문제는 격렬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