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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소신앙촌(4) – 생필품에서 제철까지①

덕소신앙촌(4) – 생필품에서 제철까지①

전국민의 사랑을 받은 '신앙촌 제품'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과 덕소 신앙촌을 건설하시자 당시의 한 사회학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아니하는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도시를 두 개나 건설하고, 공장들을 일으켜서 수만 신자가 완전 흡수되어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며 신앙에 전념하는 별천지를 만들어 놓았다.”(전 이화여대 최신덕 교수) 1964년 10월 19일자 신앙신보는 “많은 사람들이 제1, 제2 신앙촌의 웅려(雄麗)함에 찬탄을 하면서도, 그것이 […]

덕소신앙촌(3) – 건설 당시의 비화②

덕소신앙촌(3) – 건설 당시의 비화②

신앙촌의 설계에서 건설까지 어느 한구석이라도 하나님의 손길이 안 닿은 곳 없어

주택을 지을 때는 무더운 7월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작업복을 입으시고 구슬 같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시며 손수 공사에 앞장서셨다.   “그때는 레미콘 차량이 없던 때라 시멘트 한 포대를 개자면 물이 두 초롱씩 필요하였습니다. 하루 시멘트 1천 4백 포대를 썼는데 그에 필요한 물을 하나님께서 직접 길러 주셨습니다. 그 물이 딸릴까봐 한 손으로 하시다가 두 손으로 하시다가 하면서 땀을 […]

덕소신앙촌(2) – 건설 당시의 비화①

덕소신앙촌(2) – 건설 당시의 비화①

기적같은 신앙촌 건설의 신화 뒤에는 하나님의 땀과 눈물과 희생

1962년 7월 20일, 신앙촌 건설대 일진34명이 풀밭이 무성한 현재 덕소 제단 앞 공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 다음날부터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덕소신앙촌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첫 삽을 뜨기 시작했다.   “21일 저녁까지 현장에 우리와 함께 계시던 하나님께서, 내일 새벽에 다시 와서 단에 서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소사신앙촌으로 가셨다가 그 이튿날 새벽 비가 쏟아지는데도 다시 오셔서 설교해 […]

덕소신앙촌(1) – 신화의 재창조

덕소신앙촌(1) – 신화의 재창조

불가능한 조건에서 더 아름답고 더 큰 규모로 덕소 땅에 두번째 신앙촌을 건설

1962년 7월 20일, 서울에서 약 20km가량 떨어진 북한강 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와 도곡리 일대의 10만 평 부지에 두 번째 신앙촌인 덕소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신앙촌인 소사신앙촌에 이어 두 번째로 신앙촌을 건설한다는 것은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수천 세대의 사람들이 한 목적을 바라고 한 곳에 모여 사는 신앙의 도시를 […]

동아일보 사건(8.끝)

동아일보 사건(8.끝)

하나님 역사 부인하는 사람들과도 합법적 투쟁을 '종교인의 물리적 시위는 유감된 일'

동아일보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의 옥중 체험기를 계속하여 들어 본다. “1960년 12월 10일부터 두 달간 저는 동아일보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했습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동아일보사건이란, 하나님 집회 때 나타난 축복 사진을 보고 인위적인 조작이라고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것을 보고, 사실을 오도하는 기사를 정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뜻에서 찾아간 우리를 경비원과 경찰들이 곤봉으로 무차별 내리쳤습니다. 이 때에 야기된 사건을 […]

동아일보 사건(7) – 사건의 파장

동아일보 사건(7) – 사건의 파장

`얼마나 당했으면 믿는 사람들이 시위까지...` 시위사건에 일부 여론은 동정적

1960년 12월 11일자 한국일보는 동아일보사건을 ‘수천 박장로 교도 동아일보사를 습격, 신문사상 최대규모의 테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침 9시 5분경 일부 신도들이 정문의 셔터를 걷어 올리고 찬송가를 고창하면서 사내로 진입, 곧장 2층으로 올라가 비치되어 있는 서류와 신문 등을 밖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9시 반경 셔터가 완전히 올라가자 밖에 서 있던 수천 명의 신도들이 물밀 듯이 사옥으로 […]

동아일보 사건(6) – 1960년 12월 10일

허위보도 정정요구에 응하지 않는데 분노, 수천 신도들 동아일보사에서 시위

생명물과 축복 사진에 대한 동아일보사의 거듭된 악의적 허위보도에 대하여 정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시온대학생들과의 격론 끝에 동아일보사가 마침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데 대하여는 합의하였으나, 사과와 해명의 형식을 놓고 양측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1면에 정정기사와 함께 사과문을 발표해 달라는 시온대학생들의 주장과 광고란에 해명문(解明文)을 게재해 주겠다는 동아일보사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동안, 동아일보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신도들의 분노는 […]

동아일보 사건(6) 동아일보사건 당시 현장에서 부상당한 이범옥 권사 이야기

동아일보 사건(6) 동아일보사건 당시 현장에서 부상당한 이범옥 권사 이야기

동아일보사건 당시 현장에서 부상당한 이범옥 권사 이야기

1958년 1월에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였던 이범옥권사(사진, 73세. LA교회)도 1960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아일보의 허위보도를 규탄하고 사과와 정정을 요구하는 시위 대열에 끼어 있었다.    “시온대학생학우회 회장과 여학생 회장이 앞에 섰던 것 같은데 도착해서 ‘동아일보는 허위보도 사과하고 정정하라’ 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어느 순간 뒤에서 미는 힘에 밀려 얼떨결에 그냥 동아일보 건물 안으로 들어가 3층까지 올라갔습니다.   나는 […]

동아일보 사건(5) – 동아일보와의 대결

동아일보 사건(5) – 동아일보와의 대결

시온대학생들과 진지한 토론 끝에 동아일보 허위보도를 인정하고 사과

시온대학생회원들이 동아일보사를 방문하여 허위보도에 대해 항의하고 정정보도를 요청한데 대하여 동아일보는 ‘진위(眞僞)의 대결 삼일간, 박장로 교도들과 본사와의 대결경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아일보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의 감정적인 과장 보도였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기사정정을 강요하던 박장로교 광신도들이 본사를 찾아온 것은 지난 7일 낮부터이다. 그들은 소위 ‘축복’이라는 것이 ‘현실에 나타났고 우리는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해명과 정정을 요구했다. 회의실에서 […]

동아일보 사건(4) – 신태양사의 정정보도

동아일보 사건(4) – 신태양사의 정정보도

깨끗이 승복하고 정정보도

“1960년도 7, 8월경 당시 신앙촌 시온대학생회에서 나는 논리적이고 언변이 있다하여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에서 하나님과 신앙촌에 대한 왜곡 허위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고 시온대학생회에서는 이러한 언론들의 허위보도에 우리가 당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지성인들이 앞장서서 적극적인 해명을 하고 정정보도를 요구하자는 기운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당시 시온대학생회 선전부장이던 천희문(千熙文)씨의 회고이다.  “그때 마침 ‘신태양’이라는 월간잡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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